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6월 30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전격적인 제3차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다. 통상 판문점 지역에서 회담을 할 경우 북측지역의 경우에는 통일각에서, 남측지역의 경우에는 평화의 집에서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음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자유의 집에서의 회담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자유의 집은 당초부터 회담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남북 사이에 이루어지는 각종 회담과 접촉의 연락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 1998년 7월 완공된 건물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자유의 집이 지어진 것은 1965년 9월이었다. 2층의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팔각정을 얹어 놓은 구조로 총 376㎡ 규모이며, 자유를 갈구하는 북한 동포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당시로서는 남북 사이에 회담이나 접촉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자유의 집의 활용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제6공화국 정부는 1988년 7월 7일 발표한 `7·7선언`을 통해 남북관계와 북방정책에 있어 획기적인 전기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다음해 11월에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천명했다. 게다가 1989년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동서독의 통일, 그리고 소련 연방의 해체 등으로 1950년대 이후 형성되었던 냉전질서가 무너지면서 남북한 사이에서도 변화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시기를 전후해 북한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적 고립과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남북회담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 강영훈 총리가 북한의 연형묵 총리에게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제의했고, 이에 대해 다음해 1월 연형묵 총리가 답변을 보내오면서 남북고위급회담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1990년 9월 4일부터 남북의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진행됐고, 수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19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는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이어서 1992년 2월 제6차 회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등에 합의하고 `남북기본합의서` 문건을 정식 교환하여 발효시켰다.

이렇게 1990년대 들어 남북사이에서 활발하게 열리는 각종 회담과 회담 결과로 맺어지는 합의서가 다양하게 채택되면서 판문점 지역에서의 각종 연락업무도 급증하게 됐다. 이러한 남북간의 변화된 상황을 감당하려면 1965년에 지어진 자유의 집으로는 시설도 낙후되었을 뿐만 아니라 업무용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통일부에서는 완공된 지 30년 넘은 자유의 집을 헐고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자유의 집 신축은 당시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현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정경제원에서 예산편성을 인정받아 전격적으로 추진됐다. 새롭게 지어지는 자유의 집은 1990년대 중반 시점에서 향후 남북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질 상황을 대비해 지상 4층, 지하 2층으로 연면적 4742㎡ 규모로 지어졌다. 그리고 최초로 지었던 자유의 집 건축물의 상징물인 팔각정은 새롭게 신축한 건물에서도 그대로 멋지게 살려 놓았다.

판문점 지역의 중심부에 멋지게 자리한 자유의 집이었지만 북한의 핵개발과 핵실험 등으로 인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본래의 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난 6월 30일 회담용 건물인 평화의 집을 두고 자유의 집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가졌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는 자유의 집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에 편안한 장소였을 수도 있다. 필자는 회담의 내용이나 후속 조치에 관계없이 자유의 집에서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던 세기적 사건을 계기로 북한 주민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정연철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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