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듯 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유관순`의 노랫말이다.

3·1절 100주년을 맞은 때에 국가 유공자 3등급에서 1등급에 추서된 유관순 열사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열사는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유언을 남겼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어찌 유관순 열사만일까? 우리가 아는 대로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중에 기독교 대표가 16명, 천도교 대표가 15명, 불교 대표가 2명이었다. 지금에 비하여 그 당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인의 숫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으며 조국 광복의 선봉으로 쓰임을 받았다.

1910년 안타까운 한일병탄이후 일제는 그 이듬해 105인 사건을 조작해 기독교를 음해 파괴해 몰락시키기로 꾸몄다. 1915년에는 미션스쿨에서 성경공부와 예배를 금지했다.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애국정신 말살을 위해 모든 종교를 일제의 식민정책 통제아래 두도록 법제화하고 교과 과정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엄히 금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 활동은 일제의 허락아래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교회를 핍박해 생명력을 끊어 놓고자 하는 간악한 의도였다. 그러나 일제는 끓어오르는 기독교인의 애국애족 정신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통계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가 1.3-1.5%에 불과했지만 기독교인이 3·1운동의 대열에 앞장선 이유 때문에 일제에 의해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중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했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만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며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이만열 박사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한국의 인구가 1600만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1918년말 기준으로 21만2697명으로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했다. 인구비율에 비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독교인의 통계는 주동 세력면에서 25-38%, 체포 투옥면에서 17-22%로 체포 투옥된 전체 숫자와 연관성 시켜 볼 때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을 20-30%로 추정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준비 단계에서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은 거사 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다.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담당하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측과 협력하고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와 귀족원에 전달은 천도교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인상적인 것은 3·1운동을 점화한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은 기독교 주도의 애국운동이었다.

3·1운동 후 일제는 기독교를 중심 세력으로 지목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대표적으로 일본 군경이 일으킨 제압리 학살사건이었다.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예배당에 불을 질렀으며 탈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태워 죽였다. 이같은 만행은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선교사가 그 현장으로 달려가 참혹한 광경을 사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 곧 지금의 인천항에 도착한지 3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신생 종교였지만 처음부터 애국애족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삶으로 실천해 냈다.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는 지금 애국선열들이 꿈꾸던 자유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나는 과연 목사다운 목사인가를 질문해본다. 또한 아직도 동토에 묶여있는 북한 동포를 생각한다.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꿈꾸면서!

오정호 새로남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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