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진보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것이고, 나이 먹어서 보수가 안되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성향과 태도는 수시로 변한다. 젊어서 진보가 되더라고 죽을 때까지 진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한번 보수가 되면 영원한 보수가 되라는 법도 없다. 따라서, 한사람을 놓고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에 의해 단순하게 분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최근에는 어느 정권이라도 추진하는 정책마다 진보와 보수적인 가치가 혼재돼 있기 때문에 정권과 정당보다는 정책으로 진보와 보수가 수시로 나뉘기도 한다. 신세대는 진보요, 구세대는 보수라는 생각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1789년 절대왕정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시민혁명을 주도한 시민계급이 진보였고, 왕정체제를 지키고자 했던 귀족계급은 보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의 병폐를 지적하고 등장한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을 주도한 농민과 노동자 계급이 진보가 됐다. 반면에, 자본주의를 옹호한 시민계급은 이번엔 보수가 되고 만다. 그 후 1980년대 소련연방의 공산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실패하고, 체제붕괴의 위기를 맞이할 당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며 개혁과 개방을 주장한 보리스 옐친 등 새 정치세력들이 진보가 되고, 종전의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지키는 보수집단이 된다.

심지어, 1980년대 중국에서 공산주의 모택동 사상(Maoism)을 비판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한 등소평 등의 진보세력들은 국가역할의 축소, 정치적 자유의 확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자는 정책들을 내세운다. 이는 바로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보수정치인 대처수상과 레이건 대통령이 내세운 신자유주의 정책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 쪽에서의 진보 가치가 다른 쪽에서 보수 가치가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진리인 것처럼 알고 있는 "보수 = 우파·반공 = 자본주의 = 기성 세대, 그리고 진보 = 좌파·종북 = 사회주의 = 젊은 세대" 라는 공식은 잘못된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보와 보수로 나뉜 채, 낡은 이념틀에 갖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실정치와 선거에서 정략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셈이다.

진보는 대체로 평화, 인권, 환경, 민자통(민족, 자주, 통일)의 가치를 선호한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성취하고 싶은 가치들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는 선언은 꼭 한번 살고 싶은 유토피아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상적인 가치들을 적합한 사회체제와 국정운영능력으로 성취하느냐의 여부다. 진보는 추구하는 가치들이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할 때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분받는다"는 환상적인 구호로 많은 인류를 열광시킨 사회주의체제 실험은 자본주의를 대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난 바 있다.

더욱이, 보수는 궤멸 직전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만큼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보수는 그동안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와 역할을 제시하기는 커녕 냉전·반공주의에만 집착한 가운데 경제적 특권과 학벌, 지연 등 수구세력들의 기득권만을 지키는데 급급했다. 보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창당한 영국의 보수당이 300년의 전통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개혁하면서 보수인재를 꾸준히 키워왔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확대하는데 앞장섰고, 20세기에는 노동자 계급의 복지를 위해 노조와 상생하기 시작했다. 유연한 정책과 인적 쇄신을 통해 귀족 이미지를 탈피 대중정당으로 발돋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도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새 보수와 진보가 상호견제와 균형 그리고 협치를 통해 숭고한 진보적 가치와 이념을 현실화시키는 데 성공해야 한다. 동시에, 보수는 철저한 자기성찰과 혁신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보수적 가치를 새롭게 제시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봉사와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새 시대에 필요한 역할을 재정립해야 대한민국이 바로 갈 것이다.

육동일 충남대학교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