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은 언제나 읽어도 가슴이 설렌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널리 읽히던 `청춘예찬`은 청춘의 희망, 에너지, 열정, 실천 정신 등을 예찬하고 있다. 한 시절, 청년들은 이 글을 읽으며 젊은이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성찰했고, 장년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청년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자기반성을 했다. 이 글에서 예찬하는 `청춘`은 물론 생물학적인 젊음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청춘`은 시대와 사회를 건강하고 활기 있게 만들어주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청춘`들이 사라지고 있다. 지하철을 타면 청년들보다 노인들이 더 많은 듯하고, 공원이나 유원지에 나가도 젊은 사람들이 드물다. 동네 운동장은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고, 도서관은 직장을 잃은 장년층들이 유유자적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소외자들을 위한 봉사의 현장이나 정치 현장에서도 청년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에서 20대나 30대 청년 의원들이 사라져 버렸고, 주요 정당의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도 60대와 70대의 올드보이 일색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노령화가 가장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올해 우리나라의 노령화 지수는 110.5라고 한다. 노령화 지수는 14세 이하의 유소년 인구 대비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 비율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유소년 인구 100명 당 110명 이상의 노인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지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60년에는 400이 넘는다는 예측하는 통계도 있다. 노령화 지수가 늘어날수록 인구, 노동력, 생산성, 연금 등과 관련된 각종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그 많던 청년들은 다 어디 갔나?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의 모습이 전경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노령화와는 무관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구 분포에서 청년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소위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진부한 매너리즘에 빠지는 원인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기성세대들이 가진 경험과 지혜를 활용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역할이 빛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그것을 활용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지방 정치나 중앙 정치의 현장에 더 많은 청년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창업이나 취업에서도 청년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이 사회에 진입하는 초창기부터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도 더 젊어질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장관, 기업의 CEO, 대학 총장들도 더 젊어질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세대론의 관점에서 보면 젊은 사람일수록 젊은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성세대나 노인들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치관이나 문화 감각에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젊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청년이나 청년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전면에 더 많이 나서야 한다. `청춘예찬`의 설렘이 우리의 삶에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청년들 혹은 청년 정신이 있는 사람에게 앞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이형권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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