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다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신학 사상 중 하나다. 이사야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온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우리가 하느님의 생각과 길을 알 때 그분의 활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 하느님의 적대자가 아닌 협조자가 될 수 있고,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다.

하느님의 활동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는 내 생각과 내 길을 내려놓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그러지 못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악한 영의 활동방식은 행복, 자유, 기쁨 등을 위해서는 더 강해지고, 부유해지며,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자에게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따라가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려 오셨지만 모든 것을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을 거부하시고 유혹자의 길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신 길을 가신다.(루카 4,1-13) 예수님께서는 악마, 즉 유혹자를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신다.(요한 8,44) 유혹자는 거짓말을 하며 우리가 그것을 사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는(케노시스)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 30년간의 나자렛에서의 삶은 `케노시스`의 삶이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나타나시기 전까지의 30여 년간의 삶에 대해서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이 세상을 구원하러 왔음에도 예수님께서는 목수의 아들로 침묵하며 사셨다. 당시 남자의 혼인 정년기가 10대 중후반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혼인과 자녀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에 예수님의 30년간의 삶은 무시 받았던 삶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첫 제자들은 무식한 어부였고, 당신 생애의 마지막 사건들인 죽음과 부활을 제외하고 주로 활동하셨던 곳은 당시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갈릴래아`라고 부르며 천시하던 곳이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지내셨던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부정하다며 접촉도 하기를 꺼려했던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나자렛 예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자 이단아였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의 활동 방식이자 구원 방식은 바로 `케노시스`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만물을 살리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셨다. 이러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 수 있는 곳은 높고, 위대하고, 화려하고, 강력한 곳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일에 대해 이야기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35-40)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말씀하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은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 안에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마구간의 구유에서 아기의 모습으로 강생하셨듯이 지금 우리 주변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 안에 강생하신다. 하느님 활동의 협조자이길 원하는 우리의 강생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특히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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