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학연구자들, 특히 이론이나 사조가 아닌 작가와 작품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 중에는 곧잘 자신이 전공해온 작가에게 과장된 문학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상품화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상찬의 대상이 된 문인은 불가침의 권위와 불가역적인 신성을 확보하면서 절대적인 명성을 갖게 된다. 이런 작업 패턴은 문학사 기술을 둘러싼 계보 혹은 에콜, 학파 등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동되면서 문학 권력 유지의 유력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해당 연구자가 이를 통해 안정적인 생계를 도모하는 건 덤이겠지만 이들의 작업이 두고두고 재평가되어야 할 문인의 변증법적인 진실을 왜곡한다는 우려 또한 들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우리 문학사에서 소위 잘 팔리는 작가들 뒤에는 그들을 끊임없이 상품화하면서 소비 매커니즘을 재생산하는 자들이 있다. `○○○ 전문가` 혹은 `○○○ 권위자`라는 레테르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연구자는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와 기념사업 등에 특급 강사와 패널 및 위원으로 초청된다. 철통같은 밥그릇이 보장되는 것이다. 최근 서거 50주기를 맞은 김수영에 대한 열기를 보면서도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여기저기서 김수영 전문가를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 `김수영 팔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복무로 김수영의 문학적 권위와 신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나 역시 김수영을, 근대적 윤리의 문제를 첨예하게 고민한 시인으로서 상당히 높게 평가하지만, 그에 대한 지나친 고평은 어딘지 순수하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 있다. 김수영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것으로 알려진 어떤 중견 시인이 최근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수영이 있다"라는 억지에 가까운 비유적 언사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김수영을 흠모하고 숭앙하는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지나친 감이 있다. 영문학 500년의 시조 같은 작가와 서양문학을 이식한 사후 50년 된 시인을 동급으로 비교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김수영이 살아서 이런 소릴 들었다면 얼마나 민망했을까.

윤동주, 이상, 백석, 서정주 같은 문인들에게도 전문가와 권위자를 자처하면서 끝없이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과정에서 정작 호명된 근현대 문인들에 대한 정확하고 심도 있는 이해의 여지는 박탈당하기 일쑤다. 또한 자신이 떠받드는 문인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의 반대편에 있는 문인을 가차 없이 폄훼되거나 심지어는 부관참시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대하는 태도는 왜 늘 이토록 세속적이거나 극단적이어야 할까. 원체 나눠 먹을 `파이`가 적고,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쉽게 냉소하면 끝나는 것인가. 밥그릇과 이익 앞에서 문학마저도 염치를 잃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물론 모든 연구자가 이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오로지 지적 호기심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텍스트와 씨름하고 있음을 잘 안다. 내가 잘 아는 K선생님도 그런 분 중 한 분이다. 이 분은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당신이 호기심을 느끼거나 흠모할 수 있는 문인 혹은 문학적 가치를 찾아 늘 지적 편력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인과의 열애가 끝나면 결과물을 세상에 내어놓고 곧 다른 문인으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이와 같은 분들의 작업은 해당 문인의 권위와 신성을 만드는 데, 다시 말해 상품화하는 데 복무하지 않는다. 해당 문인이 남긴 작품을, 문학사적 문맥을 섬세하게 따져 가면서 읽어내고, 이를 당대의 윤리와 요구로 다시금 필터링 하는, 연구자 본연의 직무에 충실할 뿐이다.

연구자에겐 준수해야 할 윤리강령이라는 게 있다. 표절을 금하는 것이 대표적인 조항이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타협에 대한 금지 의무 같은 건 아닐는지. 그러니까 연구자 자신의 지위 확보와 이익 확대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연구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 말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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