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유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유월 앞에는 `붉은`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달라붙고 있다. 붉은 유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붉은 장미이다. 담장을 타고 넘은 장미넝쿨이며, 거리 곳곳 작은 화단에서 자태를 뽐내는 장미는 여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이 됐다. 또 이제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한여름 무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이 붉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햇살이 따가워지고, 가끔은 그런 태양이 얄미워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붉은 악마의 외침이 뜨겁게 울려 퍼지던 2002년의 유월일 것이다. 이렇듯 어느새 우리의 유월은 붉게 물들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또 하나의 `유월의 붉음`이 있다. 붉은 장미와 붉은 악마가 만들어 낸 붉은 유월 이전부터 우리에게는 이미 붉은 유월이 있었다. 유월이면 한반도 여성의 머리를 모두 붉게 물들였던 붉은 비녀인 창포비녀(菖蒲簪)가 바로 그것이다. 전염병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는 여름이 시작할 이 무렵, 우리를 지켜주던 식물 중 하나는 창포였다. 창포는 비록 웅덩이에서 풀처럼 자라고 옥수수처럼 볼품없는 꽃을 피워내지만 향기만큼은 기가 막힌 매력을 지녔다. 그래서 향수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여성에게는 더없이 좋은 화장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줄기를 잘라 끊인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는가 하면, 창포 이슬을 받아 화장수를 만들어 사용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런 창포에게는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우리네는 창포뿌리를 깎아 수(壽)자와 복(福)자를 곱게 새기고 붉은 물을 들여 비녀를 만들어 꽂았다. 붉은 비녀는 액을 막아주었을 뿐 아니라, 고운 머리장식과 독특한 향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어찌 이렇게 곱고 기특한 장식품을 마다할 여성이 있었으랴. 그렇게 단옷날이 든 유월이면 모든 여성의 머리에는 붉은 비녀가 하나씩 꽂혀져 있었다. 물론 남정네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창포뿌리로 만든 호로병박이나 작은 인형을 만들어 허리춤에 달기도 했으며, 여의치 않을 때는 창포 줄기 한 토막을 잘라 허리춤에 꼽거나 품에 넣어 다니곤 했다.

이렇게 붉은 머리비녀를 꽂고는, 또한 붉은 음식을 먹는다. 바로 앵두화채이다. 계절 과일인 붉은 앵두를 따서 씨를 빼고 꿀에 재워 두었다가 붉은 오미자 국물에 꽃잎 한 장과 붉은 앵두를 동동 띄워내는 앵두화채는 단오에 맛볼 수 있는 이색적인 청량음료이다.

유월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살구꽃이 만발하고 창포 잎이 돋아나면 바빠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창포 잎은 곧 농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삿날인 5월제가 기록되어 전하듯이, 음력 5월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는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고종 8년의 권농을 위한 반교문에는 `창포 잎이 나고 살구꽃이 피어나니 농부가 바삐 서둘러야 할 철`이라고 적혀 있고, 인조 때는 농사를 시작해야 할 이 시기에 가뭄이 들어 속상한 마음에 임금이 창포주를 거절했다고 한다.

대금이나 퉁소를 부는 연주자들에게도 유월은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바로 대금의 매력적인 음을 만들어내는 청공에 붙일 얇은 갈대청은 단오를 기준으로 약 일주일정도만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기장이에게 이 시기는 일 년 농사나 다름없었다. 대금의 명인 김성진 선생이 `대금재비가 대금을 잘 부는 것은 청이 좌우한다.`라고 했을 만큼 갈대의 얇은 막인 청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일 년에 딱 한 번 좋은 청을 채취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대금 연주자들의 애간장을 달아오르게 한다.

오는 18일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동시에 여름을 대표하는 우리의 명절인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기도 하다. 이 날이면 분명 옷장에 고이 모셔둔 붉은 티셔츠를 꺼내어 입고, 또 그렇게 한바탕 붉은 대한민국이 춤을 추어댈 것이다. 거기에 귀신을 쫓는 힘을 가졌다는 붉은 창포가 더해지면 어떨까. 우리가 만들어낸 붉은 악마 티셔츠, 머리두건에 우리 고유의 민속 장신구가 더해진다면 더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붉은 창포비녀를 머리에 꽂거나 손에 꼭 쥔 채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을 것만 같다. 조석연 대전대학교 H-LAC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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