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조선 전기에 한양을 건설한 후 화재가 빈발하자 금화법령을 제정하고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가옥 사이에 방화장을 쌓고, 요소에 우물을 파서 방화기구를 설치했다. 또 금화법령을 제정해 실화 및 방화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한편 포상 및 사면제도도 함께 가동했다. 궁궐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쳐서 알렸고, 민가에 화재가 나서 기와집 3칸 이상, 초가 5칸 이상이 타면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방화에 관한 규정이 엄격해 자기집을 불태운 자는 곤장 100대, 방화로 자기집과 이웃집 또는 관아를 불태운 자는 곤장 100대와 3년 `유형`에 처했다. 고의로 관아나 민가의 창고를 불태운 자는 참형, 왕릉에 방화한 자는 국경 변방에 유배됐고 주인집에 방화한 자는 교살형에 처했다.

세종 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인 금화도감이 설치됐다. 한성부에서 2170채의 집과 행랑채 106칸을 태워 30여명을 숨지게 한 대형 화재가 발생한데 따른 조치였다.

왕이 바뀌어도 소방법이 이처럼 계속 강화된 것은 화재 뒤에는 돌이킬 수없는 절망과 아픔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최악의 대형 화재로 기록된 1953년 1월 부산 국제시장에서 발생한 불은 3만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낳았고, 1971년 서울 대연각 호텔에서 일어난 불은 163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이 화재로 소방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면서 화재보험 가입이 의무화되고 소방법이 강화됐지만 참사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경제적 논리에 매몰돼 안전 비용을 치르지 않는 건물주, 땜질식 처방만 일삼는 소방당국, 정쟁만 앞세우는 국회. 이 모두가 늘 그렇듯이 소 잃고 외양간만 고치고 있어서다. 불은 이 모두가 책임을 다하지 않을때 발생하는 것이지만 현재 제천 참사와 관련된 비난의 화살은 현재 소방 지휘부에 쏠려있다. 경찰은 이상민 전 제천소방서장과 김종희 지휘조사팀장을 이달 초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길 예정이라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소방관에게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것이 부당하다는 의견과 부실 대응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시계 태엽을 조선시대까지 감아놓고 태종에게 묻는다면 과연 어느 죄를 부여할 지 사뭇 궁금해 진다.

이상진 지방부 제천주재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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