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는 것처럼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다. 특히나 현대 사회처럼 변개의 양상이 활발한 시공간에서 쓰이는 언어는 결코 고정될 수 없다. 옥스퍼드 대사전이나 브리태니커 사전에 해마다 새로운 단어가 등재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한국어의 어휘 변화도 뚜렷한데, 외국 체류 경험이 늘고 문화 간 간섭의 국면이 확대되면서 한국인들이 구사하는 어휘 중 외국어를 기원으로 하는 어휘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까지는 안 됐을지라도 일상 대화에서 쓰이는 외국말 어휘는 상상 외로 다양하다. 이를테면, 컴플레인, 라이딩, 피드백, 다운사이징, 리젝트, 솔루션, 콘텐츠, 클레임, 알고리즘, 스탠스 등은 10년 전만 해도 그다지 자주 쓰이지 않던 단어였지만 지금은 사무적인 대화에서 매우 친근하고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개념들이지만 외국어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평준화되면서 외국 어휘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실용적인 차원에서 수입해서 쓰면 좋을 단어가 쓰이지 않고 있는데 그게 바로 라이터writer다. 작가, 문인, 저술가를 뜻하는 영단어 writer는 누구나 알만한 친숙한 어휘지만 한국인의 평상적인 대화에는 아직까지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writer를 대체하는 단어로 `작가`라는 강력한 자국어가 있기 때문이다. 실로 작가라는 단어가 갖는 지위는 막강한데, 문제는 근래 들어 작가라는 단어의 함의가 너무 넓어져서 개념어로서의 변별력을 잃어가고 있는 데 있다. 소설가와 시인 같은 전문적인 문필가뿐 아니라 책의 저자, 그림을 그리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음악이나 영화나 뮤지컬, 방송 대본 등을 만드는 사람까지도 모두 작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writer, photographer, novelist, designer, poet, painter, author, producer, musician, creator, artist, illustrator, director 등으로 변별되어 쓰이는 말이 한국에선 죄다 `작가`로 불린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각 장르별 창작물들이 콘텐츠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창작자들에게 편의적으로 부여되는 지위로 `작가`라는 말이 가장 무난한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곧 사회적으로 선망되는 공적 신분으로서 매력적인 라이선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좋게 보면 창작 또는 창조라는 행위 앞에서는 만민의 신분이 평등해진 것인데 이 평등은 창작자들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전문성이나 숙련도의 차이를 은폐하거나 무화시킨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이 부정적인 측면이 쉽게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작가의 대량 양산이 결코 창작물의 질과 수준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고전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작가라는 직분은 인고의 산물로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창작물을 얻기 위해 숱한 시간을 고통스러운 숙련에 바친 이들, 한 줌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소외를 자처하면서 생활의 안정적인 편의를 포기해 버린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작가다. 실제로 우리가 위대한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의 삶에서는 알량한 세속적 지위로서 작가라는 말이 갖는 허세나 던적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의미 있는 콘텐츠를 고유한 방식으로 창조하는 이만이 작가로 불리어야 할 터인데, 우리는 지금 반대로 작가 인증을 받기 위해 허투루 책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 작가가 되고 있는 현실을 살고 있다. 작가는 그러니까 신분제가 와해되는 근대사회의 여명기에 `양반`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만큼은) 사회적 위신의 상징적 공유재가 된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서울 남대문 시장이나 명동에서 김작가님! 하고 부르면 꽤나 많은 이들이 뒤를 돌아다볼 것이다. 문제적인,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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