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2.0

이성과 합리성, 계몽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이래 용도 폐기된 가치이자 개념이었다. 그러나 현재 세계의 상황이 이성과 합리성을 넘어서도 좋을 만큼,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충분히 완수된 결과물인가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의 정치는 이념이나 철학, 토론이 아니라 엄청난 속도와 과잉 정보, 감정과 정념에 호소하는 메시지로 이뤄지고 있다. 그 결과, 가짜 뉴스나 조작된 정보에 의존하는 정치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계몽주의 2.0`의 저자는 `제정신` 정치를 위해 갱신된 계몽주의를 선언한다. 그는 철학과 심리학, 인지과학 분야 최근 연구들의 반합리주의적 조류를 반박하며,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사회적 환경 조성을 모색하고, 이를 위해 집합행동과 느린 정치(Slow Politics)를 주장한다. 철학,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분야 최근 연구의 주요 흐름은 이성의 한계와 직관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비·불합리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각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인간 본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는 측면이 있지만, 경제학적인 협소한 합리성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형에 의존하면서 이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흐름은 보수주의 학계에만 그치지 않고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인간의 판단과 행위를 결정하는 이성 대 직관의 경쟁에 사회문화적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흔히 우리의 정신·매체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비판되는 언론, 광고, 기업을 비판하기만 하거나 이와 유사한 방식의 `맞불 작전`을 펼쳐서는 현재의 무력한 환경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정교한 `환경 조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동조할 때 작동하는 인간의 인지적 편향에 주의를 기울이면 불합리한 편견과 사회적 차별을 완화할 수 있는 환경 조작을 할 수 있다. 또 TV 토론에서 감정적이고 근거 없이 반복적으로 쏟아지는 발언에 같은 방식으로 맞서기보다 시간제한이나 방송 금지 등 근본적인 규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저자는 `슬로 푸드 선언`에 착안, `슬로 폴리틱스(Slow Politics)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 선언은 속도와 효율의 유혹에서 벗어나 이성과 토론을 거친 느린 정치, 개인을 넘어 많은 구성원의 집합행동에 의한 정치를 주장한다. 공동체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현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숙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막 주목을 받고 있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저자의 제안은 눈여겨볼 만하다.

18세기 계몽주의를 촉발했던 이성 개념의 문제점은 이성을 온전히 개인에게 속하는 것으로 봤고 고립적으로 작동하는 지성의 힘을 과대평가했으며 개인이 속한 물질적·사회적 환경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점이다. 이 책은 집단 프로젝트인 합리성에 기반을 둔 정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줄 것이다. 박영문 기자

조지프 히스 지음·김승진 옮김/ 이마/ 512쪽/ 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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