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지(誌)가 500호 발행을 앞두고 있다. 춤지는 지난 1976년 무용평론가 고(故) 조동화 선생이 창간한 무용전문 월간지이다. 빈곤과 결핍의 시대 무용계는 춤지가 존재함으로 긍지와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일체의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무용전문지를 40여 년 동안 발행한 고집스런 집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발행인 조동화 선생의 남다른 궤적과 신념으로 귀결된다.

조 선생은 192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러시아풍 코박춤을 보고 자란 그는 서울대 약대 재학시절 함귀봉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춤을 체득한 이색적 경력의 소유자다. 60년대 초반 동아방송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신문에 최초로 `무용평론가`라는 타이틀로 무용평문을 기고했다. 지적 변혁기인 70년대 중반 월간 춤지를 창간하여 현대한국무용사에 의미있는 업적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독서인의 호사가적 취미에서 비롯된 무용평론은 춤지 창간과 더불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춤지는 무용평론가 등용문으로서 춤의 지성화를 앞당겼다. 춤문화의 고급화, 정보화, 기록화 및 비평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존재론적으로 허약했던 춤 장르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한국의 예술환경에서 출판상업주의와 결탁 없이 40여 년간 한 번도 결호 없이 매월 무용전문지가 발간됐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춤지 창간은 예기치 않은 사건에서 비롯됐다. 조 선생은 60년대 초반 동아방송 제작부장 시절 소위 `앵무새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시사프로그램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다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위기는 또 한번 찾아온다. 1975년 `동아사태`로 강제 해직되는 고초를 겪었다. 우리나라 언론자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산증인과 다름없다. 언론인으로서 순탄치 않은 삶이 그를 춤잡지 발행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유도했다. 잠시나마 춤을 체득하고 무용평론가로 활동한 인연도 작동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 선생은 일평생 춤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춤자료관 `연낙재`(硏駱齋)도 그 결실의 하나로 손꼽힌다. 조 선생은 일제강점기 선배 언론인 김을한·홍종인 선생이 물려준 한성준 공연자료를 비롯해 평생 모은 무용자료를 연낙재에 기증했다. 이를 통해 지난 2006년 국내 유일의 춤자료관 연낙재가 탄생되었다. 연낙재는 어원적으로 춤지가 들어 있는 집 琴硏齋(금연재)와 내밀한 관계에 있다. 연낙재 이름의 시원인 금연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 `一琴十硏齋(일금십연재)`에서 집자했다고 알려진다. 학문과 풍류를 숭상한다는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추사의 고향은 내포문화권 중심인 충남 예산이다. 홍성 출신으로 근대 명고수, 명무로 활약한 한성준과 동향인 셈이다.

한성준은 한국무용사에 서너 줄 기록되었을 뿐 잊혀진 존재였다. 그가 발굴되어 기념비적 인물로 우뚝 서기까지 조동화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용인 모금운동을 통해 한성준 춤비 건립을 주도한 이도 조 선생이었다. 2014년 한성준 탄생 140주년을 맞아 그의 예술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창설된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은 조동화 선생의 유지를 받든 행사와 다름없다.

한성준 되살리기에 조력하신 또 한분으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우리시대 최고의 문화지성 이어령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은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 창설 원년에 `한성준 탄생 140주년 기념`이라는 글귀를 친필로 써 주셨다. 이 글귀는 행사의 모든 홍보물에 로고개념으로 사용되었고 행사의 권위와 품격을 높여주는데 일조했다. 공교롭게도 선생의 고향 역시 내포문화권인 충남 아산이다. 추사 김정희, 한성준, 그리고 이어령 선생까지 지성과 예술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이 태생적으로 충청도 내포와 인연 맺고 있음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며칠 전 우리 춤의 시조 한성준을 콘셉트로 한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이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죽은 나무 꽃피우기`를 통해 이어령 선생은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내포에 한성준 `춤의 집`(극장)을 짓자고. 한성준을 화두로 문화인프라 구축과 정신문화적 가치 창출을 위한 담대한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춤지 500호를 발행을 맞아 내포 한성준과 연결된 `인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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