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정책적·조직적으로 조작된 역사관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말한다. 대체로 우리 민족을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에 지배돼 왔고 스스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정체된 민족으로 부각시켜, 그들의 한국 통치를 정당화시키던 의식이다.

그런데 이 식민사관은 단지 일제강점기 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이맘 때 우리나라는 교육부 전 고위공직자의 발언으로 술렁인 적이 있다. 그의 발언 내용은 한마디로 민중 99%가 잘 먹여주기만 하면 되는 개, 돼지와 다름 없다는 말이었다. 굳이 미국 LA타임즈 지난해 7월 11일자 기사를 빌리자면 "많은 이들이 바로 이것이 자기 정부가 자신들에 대해 느끼고 있는 바라고 의심하지만 그런 말은 보통 거의 듣지 못한다. 이번 언사는 그러한 의심을 확인시켜준다"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민중의 99%가 개, 돼지면 나머지 1%만이 사람이라는 뜻일까, 그리고 그 1%는 누구일까. 어쩌면 그 1%는 99%의 민중에게 혐오와 차별이라는 음식을 던져주고 자기들끼리 아무 생각 없이 싸우게 만든 후 뒤에서는 자신의 권력과 재화를 늘리기 위해 세상과 국가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진짜 돼지들인지도 모르겠다. 그 1%에게 나머지 99%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식민통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세뇌시킨 끝에, 99%의 민중은 자신들이 왜 서로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 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마치 길만 건너면 친척집이 바로 앞인데 어느 날 이념에 의해 동서로 갈리게 되었던 독일처럼, 마치 어느 날 즐거운 마을 축제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 날 마을이 둘로 나뉘어 전투지역이 돼 누가 러시아 편이고 누가 우크라이나 편인가를 외치며 싸워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600 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학살된 사건은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1%가 가진 잘못된 생각이 혐오와 차별을 만들었고, 나머지 99%는 아무 생각 없이 선동돼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미국의 하버드대 사회 과학, 사회 윤리학, 심리학 교수였던 올포트(Gorden Allport)는 이러한 이론을 만들게 된다. 그 이름 하여 `올포트 척도`라는 혐오의 단계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혐오의 첫 단계는 `부정적 발언`이다. 교묘한 차별적 행위로서의 개그나 루머, 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끼리 만의 대화, 몰이해한 억지 발언 등이 그것이다. 이제 더 나아가 둘째 단계로 넘어가면 그것은 `기피`로 발전하게 된다. 희생양 만들기, 모욕적 언사, 비인간적 대우 등으로 이제 말이 아닌 소극적 행동으로 발전 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로 넘어가면 이제 소극적 행동은 적극적 행동양식 즉 `차별, 은밀한 적대·공격`의 양상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괴롭힘, 사회적 배제, 모든 인간적 권리에서의 차별이 그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행동양식은 넷째 단계로 넘어가면서 폭행, 테러리즘, 협박 등 `물리적 공격`의 양상으로 변한다. 그러한 넷째 단계가 지속되면 이제 마지막 다섯째 단계로 `학살`이 일어난다고 올포트 교수는 말한다.

올포트의 척도는 단순히 무엇이 무엇보다 심각한지 그 급의 고저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학살`같은 끔찍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가능성이 어디서 시작돼 발전됐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차별적 유머는 차별적 말을 낳고, 차별적 말은 차별적 행동을 낳고, 차별적 행동은 차별적 폭력을 낳고 있음을. 즉, 조그마한 차별적 생각과 유머에서 시작한 것이 학살까지 갈 수 있음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우리나라는 1%가 만든 차별과 혐오 속에 놀아나고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그들의 이념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서북청년단으로 인해 국민이 얼마나 큰 아픔을 겪었는지 이제는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그러한 만행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자식을 잃은 세월호 부모들의 단식 농성장에서 짜장면과 치킨을 시켜 먹는 행위를 굳이 올포트의 혐오 척도에 비교해 보자면 3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올해 있었던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나, 사드 배치 반대를 반대하는 성주주민들에게 한 행패와 폭력을 보자면 이미 4단계에 이르렀다. 5단계의 비극이 언제 우리나라에서 다시 일어날지, 어쩌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보다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라도 의식적 비판과 판단 그리고 성찰이 필요하다. 잘못된 것을 판단 할 수 있는 의식,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혐오의 구조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의식적 행동이 더더욱 필요한 요즘이다. 종교인이여 움직이자.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의 중심에 이념이 아닌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진욱 천주교 대전교구 이주사회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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