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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광장] 생각을 잊어버린 말들

2017-06-25기사 편집 2017-06-25 15: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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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주 보고 동그랗게 앉아 있는 아이들 가운데 한 학동이 쭈그려 앉아서 눈물을 훌쩍이고 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아이는 유복(儒服)에 방건(方巾)을 쓴 훈장님 앞에서 슬프게 울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는 아이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은 대조적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본 듯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우는 학동을 바라보고만 있다. 이 장면은 서당에서 글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그려낸 김홍도의 '서당' 그림이다.

조선시대 기본교육을 담당했던 서당은 우리나라 전통교육의 상징과도 같고, 현대 우리들의 교육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훈장님과 학동들은 다 같이 모여 앉아서 '천자문'과 '소학'을 비롯한 많은 경전들을 큰 소리를 내며 외운다. 몸도 좌우로 조금씩 움직여 리듬을 타면서 성독(聲讀)을 한다. 문의(文意) 파악을 위해 문장을 반복해 암송하고, 모르는 부분은 훈장님께 정중한 예로써 질문을 구하는 수업방식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올바른 문장의 이치(文理)를 깨쳐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개인별 맞춤교육이기에 묻고 대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조선의 서당 교육은 이처럼 질문을 통해 배움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업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질문은 사고가 전제돼야 가능하다. 현대 우리의 초등학교 교실만 가도 아이들은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연신 손들고 질문하느라 교실은 질문의 바다가 된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능동적 욕구가 가장 강렬한 시기이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로 배경을 옮기면 아이들은 갑자기 변하고 만다. 자신의 목소리를 잊어가는 것이다. 그렇게도 알고 싶은 것이 많았던 친구들이 학년이 올라가면서 수동적인 학생으로 변하게 된다. 교실은 선생님이 무수히 쏟아내는 수능맞춤형 지식들을 서로 받아 적느라고 정신이 없다. 마치 남보다 많이 적어야 레벨이 오르는 게임을 보는 듯하다. 생각하거나 질문할 시간은 아예 주어지지 않고, 오직 받아 적은 지식의 양으로 대학을 배정받는다.

흔히 대학을 학문의 전당이라고 한다. 대학은 올바른 지성인, 교양인을 양성해 진리를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진리의 탐구가 학문 본연의 목적인 것이다. 이때의 학문은 글을 배우는 학문(學文)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묻고 질문하는 학문(學問)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 강의실은 마치 '침묵의 공장'과도 같다. 오직 선생님의 말씀 또는 영상의 스피커 소리만이 강의실을 채우고 있다.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핑퐁형' 수업이 돼야 하는데, 현실은 오로지 물 먹은 스펀지와 같이 지식만 빨아들이고 마는 '볼링형' 수업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처음 강단에 서는 초짜 선생님도 태생적(?)으로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들이므로 떨릴 것이 없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한국인은 왜 질문하지 않는가'가 화두가 되고 있다. 교육을 많이 시키는 나라라는 자부심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양적으로만 승부를 거는 교육이기에 사고가 전제된 수업이라는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교육에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는 패러다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을 잊어버리고 말문은 막히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누구에 의해 꼬였는지 모르지만 수원수구(誰怨誰咎)할 시간이 없다. 지금이라도 빨리 이 꼬여버린 '말문의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장악해 왔던 교실의 주도권을 학생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학생들도 주객이 전도된 비정상의 교실을 정상으로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주지해야만 할 것이다. 질문에 답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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