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친했던 인도 신부님과 담소를 나누던 중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갑자기 지구상에 몇 개의 인종이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황인, 흑인, 백인 3 인종이 살고 있다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틀렸다면서 황인(남성, 여성), 흑인(남성, 여성), 백인(남성, 여성) 요렇게 6 인종이 살고 있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인기(호감도) 많은 인종이 누구인지 아느냐 하고 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왠지 난센스 퀴즈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잠시 생각을 하던 찰나 인도 신부님이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인기 많은 인종 순으로 배열을 해 볼께요. 1위 백인 여성, 2위 흑인 여성, 3위 황인 여성, 4위 백인 남성, 5위 흑인 남성. 자 그렇다면 6위는 무엇일까요?" 저는 당연히 황인 남성이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듣게 된 대답에 웃겨서 기절할 뻔 했습니다. 정답은 `개` 랍니다. 황인 남성은 7위인 것이었죠. 이유를 물어보니 한때 유럽의 인지도 없는 연예잡지에서 인종선호도라는 신빙성 없는 조사를 한 적이 있답니다. 다른 인종들은 다 호감도가 높은 반면 유독 황인 남성의 항목에서만 호감도가 바닥이었습니다. 그리고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었더랍니다. "나더러 황인 남성과 살라고 하면 차라리 난 내 개와 평생을 살겠소." 이 글을 보고 인도 신부님이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셨던 것이었죠. 웃기면서도 아직도 세상에 만연해 있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씁쓸한 이야기였습니다.

현재 세계 인구의 3%인 2억 3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주민이 돼 자국을 떠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다수는 이주 노동자들입니다. 과거 힘없는 사람들이 `무기와 군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노예가 돼 이주했다면, 지금은 `돈의 힘`에 밀려나 이주노동자가 됩니다.

이주 노동자들 중 더 큰 희생자는 이주여성들 입니다. 지구상에 경제적으로 빈곤층에 속하는 13억의 인구 중 70%가 여성이며, 같은 일을 해도 여성들은 남성들이 받는 것의 평균 3/4을 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2배 무임금 노동을 하고, 인류의 네 가정 중 한 가정이 여성가장입니다. 또한 인종차별, 강등, 혐오증, 증오, 법적 배제, 인권침해 등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선 인도 신부님의 이야기는 정말 우스갯 소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 세상에선 인종선호도의 기준이 외모도 성별도 사랑도 아닌 경제적 강자와 약자의 순으로 배열되고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여러분들은 인종 선호도 순위에서 몇 위 입니까?

하지만 그런 순위로 인해 만족해하거나 절망할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적용되는 선호도 순위의 기준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분의 마음에 입각해서 본다면 우리에게는 차별도 순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마산교구의 카톨릭 지성인 이제민 신부님께서 토론회에서 이러한 신앙관을 발표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이란 `나`는 사라지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활은 `세상`은 사라지고 `나`만 살리는 부활이다. 우리는 죽어서 영복을 누리는 부활이 아니라, 지금 사는 동안에 겪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와 영원하신 하느님을 닮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땅과 재물과 명예의 노예가 돼 사는 길을 접어야 한다."

결국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선호도(그렇다고 선호도에서 멀수록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순위의 기준을 굳이 따지자면 `지금!`, `여기서!`, `내 곁의 그에게!`, `빵이 돼 주는 것`,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일수록 선호 순위가 높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부활의 삶은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완성돼 영원히 이어지겠죠.

이제 조금 있으면 카톨릭에서도 개신교에서도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이 기쁜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쁘기 보다는, 그렇게 아버지의 말씀대로 충실히 살며 그분의 뜻을 위해 죽는 자는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가능성, 즉 희망을 주셨기에 기쁜 것입니다. 곧 우리도 다시 살아 날 수 있기에 기쁜 것이지요. 하지만 입으로만 믿는다고 외치는 자는 어쩌면 입만 부활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 다시 말해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내 삶의 자리에서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빵이 되는 자만이 영원한 부활에 참여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오늘도 노력합니다. 이진욱 천주교 대전교구 이주사회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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