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중반 산업 통상 자원부에서 이런 발표를 했다.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제품들, 세계 시장 1위`. 워낙 많아서 일일이 열거 할 수는 없지만 자랑스러운 일임은 분명하다. 반도체·자동차 부품·유조선 등 44개, 의류부속품·화학제품·섬유제품 등 21개가 세계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부품이라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랑스러운 한국이 놓치지 않고 그동안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다른 모습은 없을까. OECD 국가 중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남녀불평등(임금), 출산률,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산재 사망률, 연간 노동시간, 가계부채, 결핵발생률, 낙태율 등이 1위이다. 정책결정투명성, 1인당 독서량, 성인 학습 의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 언론자유지수는 꼴찌이고 이외에도 GDP대 사회복지지출비율, 정규직 비율, 법체계의 효율성, 공무원 의사결정 편파성, 사법부 독립성 등이 꼴찌에 근접해 있다고 한다.

상위 1%의 소득점유율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우리 나라 전체 부의 12%를 차지하며 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은 미국 다음으로 전체 부의 44.5%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하위 90%가 전체 부의 55.5%를 나눠먹는 나라. 죽어라 일하다 사고를 당해도 산재처리 해 주기 싫어 달려온 119 구급차를 돌려보내는 나라. 최소한의 살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고공농성을 벌이는 남편에게 주기 위해 들고 간 아내의 밥을 막는 나라. 농민과 식량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한국인의 주식인 쌀 시장을 완전 개방하는 나라. 산업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며 국민 안전을 볼모로 핵발전소를 강행하는 나라. 경제적으로 어렵고 너무 추워서 헌 옷 수거함에서 옷을 꺼내입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절도죄로 입건하는 나라. 공권력에 의해 농민이 죽었는데도 사과 한마디 않는 나라. 나라를 집안 회사처럼 운영하다 들통 났음에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 군대에 가서 받을 고생에 가슴 아파 자기 자식은 한국 국적을 포기시키면서, 차디찬 진도 앞 바다 속에서 떨고 있을 남의 자식의 죽음엔 아랑곳 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갑자기 국가가 망하는 7가지 사회악이라는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국가를 이루는 건 국가의 구성원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국가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주인공들을 탓 할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 중 하나인 나 자신을 탓 해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무관심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종교와 가정을 아프게 만들었다.

요즘 사무실에서는 그동안 많은 일을 하고도 임금을 떼이고 버려진 중국 노동자들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다. 받아야 할 임금의 100%도 아닌 80%만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노동자 친구들의 의사에 합의를 해놓고도 이조차도 주기 싫어 말을 번복하는 기업인들이 이제는 괴물로 보인다. `누가 이들과 세상을 괴물로 만들었는가` 하고 혼자 자문해 본다. 그것은 간디의 표현처럼 원칙 없는 정치를 하는 정치인, 도덕 없이 상업만을 하는 경제인, 노동 없이 부를 축적하는 기업인, 인격보다 지식만을 강조하는 교육인, 인간성 없이 과학과 경제 논리 위한 연구를 하는 과학인, 양심 없이 쾌락만을 쫓는 문화인, 마지막으로 희생 없이 `복` 만을 구하는 종교인일 것이다. 그들은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앞의 6가지는 얘기해서 무엇하랴, 이미 사회 곳곳에서 곪아 터지고 있는데.

나 자신이 종교인이어서인지 마지막 항목에 큰 공감을 해 본다. 각 시대에 하느님의 섭리와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려 하는지 깊이 살펴보고, 그 길에 동참해야 한다며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야 한다고 천주교 교리는 가르친다. 이는 단순히 천주교만의 교리일 뿐 `사랑과 자비`라는 큰 신앙의 틀 안에서 본다면 개신교도 불교도 포함될 것이다. 여기서 포함된다는 말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그것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즉 동참을 뜻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당하며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려 하는가. 그러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우리의 재물, 시간, 노동, 소통, 공감을 내어놓는 희생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기꺼이 이를 감수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입으로만 말하면서, 일요일에 성스러운 곳이라 불리는 장소에 가서만 말할 뿐 그 문을 나서는 순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그런 우리를 과연 종교인이라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된 이유는 그동안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았던 우리 탓이다. 이 나라 종교의 희생이 사라지고 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적인 미신이 된 이유는 그동안 내가 가진 종교적 신념을 살아내기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았던 우리 탓이라 말하고 싶다. 이진욱 천주교 대전교구 이주사회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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