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몸과 마음 움직일 수 없어 스스로 욕망·화를 통제 할수 있는 삶 의지를 결단하고 실행할때 진정한 '나'

"그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먼저 이름을 대고, 다음에 나이나 직업, 직책 등을 나열한다. 하지만 이름은 가리키는 `말`일 뿐이어서 `그대`라는 말이나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나이나 직업, 직책 등은 자주 바뀌는 것이니 장식품이나 다름없다. 누군가 나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본질(essence)이란 나를 나이게끔 만드는 무엇, 나를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구별하게 만드는 근본적이고 고유한 사물이나 성질을 말한다. 나의 본질을 찾아보기로 한다. 육체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의 육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 다른 것은 다 바뀌어도 그것 하나면 있다면 여전이 `나`라고 인정할 만한 것이 나의 본질이다.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불행한 사고를 당해 양 팔이 잘렸다고 하자. 팔이 없어졌거나 혹은 의수를 하였어도 갑돌이는 여전히 `자기`라 생각할 것이고 사람들도 그를 갑돌이로 대할 것이다. 화상 등의 이유로 얼굴성형을 심각하게 하였을 때,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어도 사실을 알고 나면 곧 그를 갑돌이라 부를 것이다. 팔이나 얼굴은 나의 본질이 아닌 것 같다.

예전에는 심장을 본질처럼 여겼지만 남의 심장을 이식 받은 사람이 그 심장의 원 주인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뇌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뇌가 손상되거나 뇌사상태가 되더라도 우리는 그를 같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DNA를 본질로 보자니 이것이 같은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상대방을 `남`이라고 생각하므로 곤란하다. 육체에서는 나의 본질이나 정체성을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기억은 어떤가. 나는 나만의 독특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10여 년 전 일본에 한류를 불러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의 남자 주인공은 기억을 상실하여 여자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드라마 속 사람들은 모르지만 시청자들은 기억상실 이전과 이후의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때는 오히려 육체가 더 사람의 본질에 가깝다. 사실 기억은 계속 새로 쌓이고 옛것은 왜곡되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나의 본질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결국 영혼을 인정해야 할까? 육신은 죽어도 변치 않는 존재, 감정을 가지고 생각과 기억을 주관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해야 할까?

영육이원론을 주장하는 종교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사후에 영원히 사는 `영혼`은 없다고 말한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정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자신에 대해 잊고 있는 경지를 무아지경이라 하고 교만심이나 자신을 내세우려는 감정이 없는 것을 아상(我相)이 없다고 하여 무아가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아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본을 꿰뚫어보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아`에는 변치 않고 근본이 되는 본질이라는 뜻 이외에 실천적 의미도 담겨 있으니 `주재(主宰)하는 성질(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의 의지로 결단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있는 것을 `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육신은 나, 혹은 나의 것인가? 앞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눕고 싶으면 누우니 육신은 내 것으로 생각된다. 팔이 마비되면 "내 팔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의지로 움직일 수 있으면 `내 것`이라고 생각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육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장기의 움직임, 노화나 죽음을 내 뜻대로 조절하지 못하므로 근본적으로 육신을 `내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살고 있는 집을 마음대로 팔거나 수리할 수 있으면 `내 집`이지만 도배나 칠 정도밖에 하지 못하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마음은 내 뜻대로 움직이는가? 길게 보면 내게 해가 되는 욕심이 생길 때 참을 수 있고 화가 나도 이겨낼 수 있다면 `내 마음`이겠지만 `작심삼일`이라 하듯 마음을 의지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다.

종합해보자. 나를 나이게끔 만드는 나의 본질은 몸과 마음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몸과 마음을 의지대로 움직이고 변화를 주도할 때, 그것은 그대로 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능이나 중독을 따라가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듯이 이때의 의지는 잠깐의 쾌락을 위한 무지의 소산이 아니고 오래, 그리고 여럿이 즐거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의지여야 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나도 모르게 화를 내지` 않도록 통제하며 살아가는 세월만큼 `나`의 역사는 쌓여간다.

최기표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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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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