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서구열강 침략 격변기 왕권강화·균형외교 중심 역할 뛰어난 정치적 감각 반추 계기

올해가 명성황후(1851-1895) 시해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바로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5시 일국의 국모를 구중궁궐까지 쳐들어와 시해한 일본의 만행이 저질러진 날이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 가문으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6대손이 된다. 명성황후(본명: 민자영閔紫英)는 경기도 여주에서 여흥민씨 가문인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이씨 부인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명성황후는 8세에 양친을 잃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일가에 기탁하고 있는 외로운 처지였다. 1866년 3월에 삼간택에서 선발되었으니 고종황제보다 한살 연상인 16세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묘사를 살펴보면 아름답고 총명하고 기품 있고 사교적이고 매우 독서열이 강하였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처음에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궁중의 모든 어른들을 섬기고 궁인들에게도 잘 대하여 궁내에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정작 지아비인 고종황제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1868년 윤4월에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던 궁인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나자 명성황후의 입지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의 독서를 열심히 연마하면서 고종황제에게 여인으로서 보다 정치적 반려자로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명성황후가 살았던 1851-1895년 동안은 한국 역사에서 국내외적으로 격변이 심했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봉건체제에 도전하는 민중세력이 형성되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세동점의 물결 속에서 제국주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상황이었다. 즉 근대화를 추진해야 되는 과제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안겨졌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고종은 그의 친정 의지를 실현시키고자 명성황후를 통해 민씨 친족세력을 정치적 배후세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으며, 유교적 윤리관에 입각해 아버지인 대원군에 대한 정면 도전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명성황후를 전면에 내세워 우회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 즉, 대원군의 고종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유교적 충의 윤리에 어긋나고, 반면에 고종황제의 대원군에 대한 도적전은 유교적 효의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정치주도권을 둘러싸고 초래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있게 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으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통해 고종황제를 보좌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또한 대외관계를 기민하게 파악하고 대처하여 어느 정도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외국인들의 기술을 보면 하나같이 명성황후가 총명하고 외교력과 정치력이 뛰어났음을 묘사하고 있다. 청국과 일본의 각축이 치열한 상황에서 명성황후는 세력 균형의 외교정책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견제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더욱 적극적으로 친러배일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본은 조선 병합의 최대 장애물로 명성황후를 지목하게 됐고, 결국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조선은 열강들이 내세우는 최혜국 조관에 의해 이권 획득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강제로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15년 만에 식민지화의 야욕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개화기 명성황후의 정치적 입지의 중요성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35년 만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광복 70년에 대한민국의 성취를 이룬 것은 명성황후를 비롯한 애국열사, 독립투사들의 희생이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제 일본당국은 명성황후 시해를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진실된 역사반성 위에서 앞으로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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