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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 노인을 위한 '엔학고레'

2015-05-27 기사
편집 2015-05-27 05:16:12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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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을 바쳐 헌신한 부모님 삶의 무게 참아내던 책임감 이젠 관심·도움의 손길 필요 위로·축복 받는 사회 조성을 "

오래전에 지인들과 함께 어느 시골길을 운전해 가는데 '엔학고레'라는 음식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엔학고레'가 무슨 뜻이지? 일행 중 목사님도 한 분 계셨지만 이 말이 성경에서 유래된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본의 아니게 설명을 하게 되었다. 히브리어로 '엔'(우물)과 '학고레'(부르짖다)라는 말이 합하여 된 '엔학고레'는 이른바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한다. 이처럼 평범하지 않은 단어를 아주 한적한 시골의 작은 음식점 간판으로 마주치게 된 것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구약성경 사사기 15장에 나오는 엔학고레 이야기는 힘이 대단한 인물로 잘 알려진 삼손과 관계된 유래를 가지고 있다. 천하의 제일가는 장사였던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적군 1000명을 죽이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자 너무 목이 말라 갈증으로 죽을 것 같게 되자 울부짖으며 기도하여 샘이 솟아나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부르짖는 자의 샘' 곧 '엔학고레'라는 이름이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엔학고레 이야기를 상기할 때마다 뭔가 애잔하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1000명이나 무찌를 수 있는 괴력과 담력의 영웅일지라도 결국 우리 평범한 사람들처럼 한 모금의 물에 갈급할 수밖에 없는 인간 육체의 한계성, 빛나는 승리의 영광을 자랑하는 영웅일지라도 결국 절대자에게 간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영혼의 겸손함이 새삼 깨달아지는 것이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다고 칭송을 받는 지도자와 위인들도 사실 알고 보면 삼손과 마찬가지로 거의 죽을 것 같이 목이 말라서 울부짖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찌 대단한 업적과 승리를 거둔 영웅과 위인들만 목이 마르겠는가? 제대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삼이사(張三李四) 우리 필부(匹夫)들 모두 나름대로 갈증에 허덕이는 삶에 지쳐 울고 싶은 사람들 아니던가? 또 생각해보면 어찌 세상에 알려진 큰 이름만이 큰 지도자이겠는가? 우리 가족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우리의 부모님이야말로 일천 명도 넘는 적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일만 번도 넘는 난관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둔 우리의 진정한 영웅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마치 삼손처럼 우리 부모들도 삶의 승리를 눈앞에 보면서도 오히려 너무나 죽을 것 같은 갈증의 고통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삼손의 엔학고레, 곧 부르짖는 자의 우물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면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보다는 늙은 우리 부모님, 그리고 늙어가는 우리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울렸던 영화 '국제시장'이 주었던 감동의 무게는 곧 '아버지'라는 존재가 감당해야 했던 모든 삶의 무게, '부모'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와 같은 것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고 노력했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모두 삼손 같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두 기력이 쇠잔하여져서 오히려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부모님이 늙어가고, 우리 자신이 늙어가고, 대한민국이 늙어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노인 인구는 약 550만 명으로 인구 10명 중 1명이 노인인 셈인데 앞으로 2025년에는 노인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된다고 한다. 호모 헌드레드, 백수(白壽)의 세상이 다가왔지만 할 일 없는 백수(白手)의 고통도 클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48.6%로서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노인 자살률 역시 인구 10만 명당 81.9명으로 OECD 가입국가 중 1위라고 하는 우울한 발표가 있었다. 내 자신이 이제 곧 공식적으로 노인이 되는데 우리 모두에게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이 열려서 삶의 위로가 넘치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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