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정의 실현 외침 '작설' 향기처럼 퍼져나가 국민 보기 부끄러운 정치 바른 길로 가는 세상 염원 "

지난 일요일은 `4·19`였다. 55년 전 부정부패의 독재정권을 학생들의 의거로 물리친 역사에 대한 되새김의 날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4월 20일은 `곡우(穀雨)`였다. 이 절기엔 온 천지가 꽃향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곡우의 절기는 봄의 절정이다. 하여, 나는 4월을 가장 좋아한다. `잔인한 4월`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향기의 4월`이라고 부른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은 사연 때문이다.

4·19와 곡우는 늘 따라온다. 55년 전의 4월 19일에 대한 필자의 추억은 아련한 과거이지만, 곡우가 따라오기 때문에 그 추억이 매년 새롭다. 그 아련한 과거 4·19의 해에 필자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해 4월 초에 필자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 입학한 학교는 혜화동에서 낙산으로 오르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신부지망생의 중고등학교인 `소신학교(小神學校)`이다. 방학 때가 아니고는 외출이 금지되어 있고, 기상에서 취침까지 오로지 공부와 기도로 짜인 일과에 따라 6년을 사는 학교이다. 그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보름가량 지난 즈음에 담 너머의 동성고등학교와 기슭 아래의 서울대학교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휴식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학교 옥상에 올라가보니, 서울대학교 앞의 도로에 사람들이 떼 지어 밀려가고 밀려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스승 신부님들에게 벌을 받게 되었다. 신학생은 세상일에 관심 주지 말고 오로지 공부와 기도에만 열중하라는 꾸중과 함께 벌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담 밖의 소란에 궁금증을 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몰래몰래 옥상에 올라가보는데 비가 내렸다. 길 건너 대학교 앞에 많은 군중이 비를 맞으면서 천천히 걷는 모습이 보였다. 총 맞아 죽은 사람들을 위한 장례행렬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소식을 스승 신부님들이 전해주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가 입학한 중학교 1학년 어린 촌놈 신학생으로서 그 소란의 원인을 잘 알 수는 없었다. 나중에 그 4·19의 화보집을 보게 되었을 때, 옥상에서 건너다보던 광경과 흡사한 사진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 내리는 길을 묵묵히 걷는 군중의 장례행렬 모습이 수십 년 지난 지금의 필자 뇌리에 `그게 4·19`라고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매년 4·19와 함께 따라오는 곡우는 필자가 맞이하는 4월의 특성이다. 곡우에 내리는 봄비는 그해 농사를 풍년 들게 한다는데, 4·19의 `뜨거운 청춘의 피`가 정의(正義)의 토양 위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그렇듯 봄비처럼 흘러내렸다고 필자는 회상한다.

곡우 전에 이파리를 따서 덖은 녹차를 일컬어 `우전(雨前)`이라 한다. 그리고 곡우 전후의 어린 찻잎을 따서 덖은 차를 작설차(雀舌茶)라 한다. 새의 혀를 닮았기 때문이란다. 4·19를 따라오는 곡우의 작설차를 필자는 `4·19차`라 일컫고 싶다. 새의 혀 같은 찻잎의 향기처럼 4·19 청춘의 소리가 우리네 입속에 가득해지길 기원하여, 꽃향기 가득한 이 곡우 절기에 그 `4·19차`를 나의 입에 머금고 싶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망각한 헛소리를 뱉는 입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봄철에 찾아온 새들처럼 진정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친 4·19의 젊은 혀로 말하는 세상이기를 기원해본다. 또한, 추잡스런 돈거래로 정치한답시고 거짓을 머금어 발설하는 혀로써 백성의 귀까지 더럽히지 말고 진실을 고백하는 혀로써 모두의 생각들이 향기로워지기를 바라면서, 이 4월의 절정에 작설차 덖는 향기가 남녘 지리산 계곡에서 북상하여 온 누리에 퍼지기를 기대한다. 내가 도반(道伴)이라 부르는 친구 스님은 이때쯤 지리산에서 나에게 작설차 한 봉지를 보내준다.

새의 혀를 닮은 작설차, 그것은 청춘의 상징이다. 작설은 어린 새들을 연상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봄에 또한 잊을 수 없는 4월 16일의 어린 새들이 있다. 어린 새들의 혀가 들려주는 노래는 봄의 소리이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망각의 캄캄함 속에 묻어둘 수 없는 `세월호`와 함께 저기 그 차디찬 바다 속에 봄의 소리가 잠겨 있다. 그러나 필자처럼 늙은 사람들이 그런 봄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의 현실 때문에 이 4월은 잔인해진다.

윤종관 천주교 하부내포성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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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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