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연을 맺기 전 우연히 TV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법당에서 절하는 장면을 보았었다. 그 장면이 너무 신기해서 형제들에게 "와! 교복 입은 학생들도 절에서 절을 하네"라며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와는 거리가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형의 인도로 불교에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불교와 사찰에 흠뻑 빠져서 살았다. 입학하면서 절에 다니기 시작하여 고3이 되어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까지 한 주도 절에 빠지지 않았다고 기억된다. 사춘기의 남녀학생들이 자유롭고 건강하게 어울리는 모임도 좋았지만, 법사스님께 듣는 깊이 있는 설법과 불교의 가르침으로 얻어가는 철학적 갈증의 해소가 더욱 좋았다. 방학 때면 수련회에 가서 발우공양과 참선, 1080배 등의 힘든 수행을 했지만 그런 신체적, 정신적 고행도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무척이나 큰 에너지원이 되었다.

몇 년 전 우연히 그 시절의 일기와 메모를 다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 나의 인생관과 살아가는 모습이 그때의 나와 다르지 않음에 깜짝 놀랐다.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나는 이미 지금의 나의 삶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인생에 있어 미래 선택의 가장 큰 고민을 했던 두 번의 시간은 고등학교 졸업 때와 대학을 졸업할 때였다. 두 번 다 독립과 가출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시간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의 가출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어머님께 가출에 대한 각오와 말씀을 하도 자주 드려서 졸업하면 당연히 집을 나갈 거라고 생각하실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감당하며 살아가는 독립에 대한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서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런 날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기대와 계획은 자연스럽게 유보되었다. 부모님의 지원 아래 누릴 수 있는 대학생활의 무한한 자유와 낭만, 그리고 지적(知的)인 충족과 정신적 성장은 이전에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세계였다. 나는 대학이라는 그 자유롭고 신나는 시간을 넘치도록 즐겼다. 오죽하면 군 입대도 졸업 뒤로 미루고 그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들을 만끽했을까.

대학 졸업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가출을 결정했다. 지난 시절 살아왔던 흔적들을 정리하고, 몇 권의 책과 속옷 몇 벌을 챙긴 단출한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왔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길이었다. 부모님과 형제간의 정과 인연을 끊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부터는 각자 다른 갈래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결정된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뒤로하고 걷는 걸음 속에는 때로 혈육의 정이 멀어지며 울컥 밀려오는 슬픔과 아픔 같은 것도 있었고,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감정들보다는 이제 전혀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 날들은 이제 `나의 날들`이라는 기대와 기쁨이 더욱 힘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독립의 길을 가는 것이다. 더 이상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선 가출의 길이 30년이 다 되어 간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50대 초반의 중년에 접어들었다. 가끔 주변의 도반들이 세월의 무상함에 스스로 놀라움을 토로하곤 한다. "스님, 전 가끔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벌써 제 나이가 이렇게 되었다니 실감이 안 난다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산사에 와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다. 세상 어느 곳에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원하는 대로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마름을 느끼곤 한다.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과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출과 독립에의 갈망은 나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원일지도 모른다.

그대, 지금의 삶이 안온하고 만족한가? 아니면 불편하고 힘겨운가? 어느 쪽이든 한 번 떠나보라. 지금 있는 그 자리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떠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리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주경 스님 서산 부석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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