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어제 제헌절날 개헌 얘기가 나왔다. 지난해 대선 즈음에 반짝하다가 잦아들었던 의제다. 그걸 경축사를 한 강창회 국회의장이 다시 끄집어 낸 모양새다. 상대적으로 개헌 논의는 식상하다. 나왔다 들어갔다 수 없이 반복한 까닭이다. 강 의장이 던진 개헌 카드도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식목일날 나무 얘기하고 한글날 훈민정음 창제 거론하듯 제헌절에 개헌 얘기한 것으로 치면 크게 의미 부여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래서 개헌 문제는 늘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식이었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불씨를 지피곤 했지만 반대진영은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정권을 어느 세력이 잡든 상관없이 말을 꺼낼 때엔 본전 건질 생각은 꿈도 꾸면 안 되었다. 개헌에 덧씌워진 이런 이미지 때문에 개헌 문제는 휴화산일지언정 원천적으로 폭발(발전적 논의)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현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 이슈를 강 의장이 제헌절을 택일해 방아쇠를 당기는 형국을 연출했다.

강 의장의 개헌 방아쇠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개헌 공이를 때려 논의를 확산시켜 새 개헌안을 뿜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단순 격발로 그칠 수도 있다. 다만 기왕 뱉은 말 속엔 개인의 소신과 철학이 장전돼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후속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국회의장은 국민 대의기관인 입법부의 수장이고 국가의전 서열은 대통령 다음가는 2위의 요인이다. 무겁고 엄중한 직위에 있는 입장에서 원칙론을 설파하는 것에 그친다면 싱거운 일이다.

나머지는 강 의장이 사려 깊게 판단하면 된다. 문제의 본질은 개헌에 대한 해석이고 범위일 것이다. 그런데 일을 진전시키려면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건 자제해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경구가 개헌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니 새 개헌안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끝이 안 보이게 돼 있다. 단적으로 요즘 여야가 피터지게 싸우는 사안인 NLL(서해 북방한계선)과 관련해 영토 조항을 다룬다고 가정했을 때 그거 쉽게 결말이 안 난다.

그런 관점에서 강 의장이 제안한 개헌론은 대통령의 임기 논의가 시발점이 돼야 맞을 듯하다. 정치권 안팎에서 개헌 얘기가 왜 불거져 나오는가를 잠시만 천착해보면 안다. "개헌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의 기저에는 대통령 임기를 조정했으면 하는 의도가 내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현행 헌법상 대통령 임기는 5년이다. 개헌 논의에서 대통령 임기 문제는 핵심적인 키워드다. 임기를 늘리고 줄이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정치적 담론 영역이고 법국민적인 합의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동의한다면 다음 단계를 바로 밟을 수 있다. 5년 임기를 조정한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충족될 경우 그 조정은 임기 단축으로 귀결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4년 임기안이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그러면 현행 5년 단임을 4년 단임이나 중임으로 발전시켜 공론을 확장시키는 길이 열리게 돼 있다. 문제의 4년 임기 속엔 몇 가지 코드가 있다. 일단 대선 주기가 빨라진다. 대선에서 패배했을 때 4년 후를 기약하는 것과 5년 후를 기약하는 건 물리적인 기간으로서의 1년 차이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런 비유가 가능하다. 5년 임기 대통령을 연속으로 배출하면 10년이다. 이게 4년 주기 대선이었다면 2.5개의 정부가 연속됐다는 뜻이 된다. 진보진영의 경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합쳐 10년 집권했다. 이제 보수진영이 그 도정에 있다. 이명박 정부는 퇴장했지만 박근혜 정부가 2018년 2월까지 존속한다. 차기를 노리는 입장에선 부지하세월일 수 있다. 이걸 4년 임기로 개헌해버리면 사이클이 앞당겨진다. 그리고, 4년 임기와 총선 주기가 꼭 같은 해 도래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중간에 지방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표현을 빌리면 '회고적 투표' 기회가 있어 중간평가를 할 수 있다.

새정부가 출범한지 다섯 달이 돼 간다. 허니문 기간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정국은 살벌하다. 강 의장의 개헌 마케팅이 정쟁의 선의의 피난처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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