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순 전주비전대학 명예교수

재독(在獨) 철학자 한경철 교수가 쓴 책 중에 `피로사회`가 있다. `피로사회`는 현대사회를 단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데 삶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만족은커녕 오히려 우울하고 스트레스는 점점 증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할 수 있어!`라며 스스로 억지 긍정을 하면서 끊임없이 `무한한 성공`을 독려한다. 그러니 피로할 수밖에 없다.

화이트 헤드는 `피로`를 `이성`의 반대 개념으로 본다. 이성이 삶의 엔트로피를 줄여주는 보약이라면, 피로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독약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현대사회는 이성적 사회가 아니라 피로를 생산하는 사회다.

피로사회의 또 다른 이름은 `성과(成果)사회`다. 무한 성공을 독려하는 성과사회의 부정적 측면이 피로사회인 것이다. 성과사회는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우선의 성과를 내는 데만 관심이 있다. 지난날 인간을 피로하게 한 것이 타인의 강제와 규율이었다면 현대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성과사회로 변화한 것이다.

`우울증`은 성과사회가 초래한 `시대의 질병`이다. 한병철은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쓰러지면서도 스스로를 피로하게 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오히려 성과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현상이 우울증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성과사회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시대병(時代病)이다.

`소비사회`도 현대사회의 별명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소비지상주의는 마케팅의 전제가 되었다. 소비사회란 사고 싶은 것을 사는 사회, 즉 욕망이 극대화된 사회를 말한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지름신`이라는 은어(隱語)가 있다. 이 용어는 동사 `지르다`의 명사형인 `지름`과 `신(神)`의 합성어로서 `충동적으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네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많은 사람이 계획되지 않은 소비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소비사회의 특징은 소비를 할 때 이성보다 욕망에 의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욕구`와는 달라서 필요로 하는 것이 일단 충족이 되더라도 끝없는 소비를 요구한다. 소비사회 이전에는 욕구에 의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소비했다면 소비사회는 욕망에 의해 끝없이 소비하며 이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만족이란 애당초 없을뿐더러 만족을 얻는다 해도 일시적일 뿐 곧 다른 욕망에 의해 갈증을 느끼게 된다.

소비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조차 돈으로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돈으로 살 수 없던 것조차 이제는 가격이 매겨지고 거래되는 시대가 되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돈으로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존재들은 비쌀수록 품질이 좋을 것이라는 `가격-품질 연상효과`까지 널리 인식되어 사회를 점점 더 황폐화시키고 있다.

현대사회의 또 다른 표현으로 `닫힌 사회`도 있다. 우리는 대개 현대사회를 모든 것이 공개되어있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투명한 사회가 `열린 사회`는 아니다.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열린 사회가 아니다. 비판과 토론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인터넷에는 엄청난 정보와 뉴스가 넘쳐나지만 그들에 대한 토론과 비판은 너무 극단적이거나 제한되어 있다. 현대사회가 닫힌 사회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닫힌 사회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소통`이 안 된다고 난리다. 소통의 모양은 있으나 진정한 소통이 없다.

`위험사회`도 현대사회를 예리하게 꿰뚫는 표현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사회생활의 위험성은 그만큼 커졌다. 과거에는 없었던 각종 새로운 질병과 사고, 범죄, 그리고 상식을 파괴하는 이상한 사상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에 사로잡혀 허둥대며 문명의 이기(利器)와 혜택을 만끽하고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피로사회, 소비사회, 닫힌 사회, 위험사회는 모두 현대사회의 우울한 키워드다. 이들은 다른 듯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그 안에 일, 욕망, 성과, 과학, 기술, 풍요, 이기심 등이 복합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충족시키되 이성을 좇아 절제하는 것만이 피로와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필요한 것만 소비하면서도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길이요, 열린 마음으로 건강한 비판과 토론을 하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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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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