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의미의 청년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반에 형성됐다"

이기훈 서울대 강사는 계간지 「문화과학」2004년 봄호에 기고한 `청년, 근대의 표상`이라는 글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청년은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말"이라며 특히 "종중의 수직적 결합이 강하고 공동체가 단일 신분이나 계급으로 조직되는 사례가 드물었던 18-19세기 조선 사회에서 독자적인 연소자 문화나 집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청년이라는 말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계통의 청년회였다"면서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1905년 이후 애국계몽운동 시기부터였다"고 분석했다.

`국망(國亡)`의 위기 상황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은 나라를 구원할 영웅으로 표상되는 근대화된 국민으로 거듭나야 했으며, 이 영웅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로서 `청년`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식민지로의 전락을 통해 "구국계몽의 실천적 모델로서 영웅은 `방탕한 호걸주의`나 `부동영웅` 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면서 이후 민족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 초 청년은 민족 계몽의 근대적 주체로서 급격히 재정의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 유학을 통해 청년층의 역동성을 경험한 유학파 지식인들이 1920년대 문화정치에 편승해 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그 속에서 청년층은 "식민지에서 근대화의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표상하는 개념"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청년상은 "초등교육 취학률은 20%대에 머물렀고 대부분이 20대 초반 이전에 가정을 이뤘던" 당대의 젊은 세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운동의 전략으로 설정된 `청년`의 이미지가 현실의 청년들에게 규범으로 제시됐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 청년상의 또 다른 특징으로 "지극히 남성적 담론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형식적 차원에서라도 `청년`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하게 된 것은 사회주의 청년 운동이 성장하면서부터였다"고 밝혔다.

그는 "1923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진행되며 통합적인 근대적 계몽의 주체로서 청년의 이미지는 붕괴한다"면서 "민족을 통합하고 그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주체로 상정됐던 `청년 조선`의 이미지는 해체되고, `무산청년`이 강력히 대두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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