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관음보살좌상' 왜구에 약탈 추정
법원 1·2심 판결 반대, 대법 판결 관심
부석사 불상 제자리 봉안 간절히 기원

박계교 디지털뉴스 2팀장
박계교 디지털뉴스 2팀장

조선시대 왕들은 군사를 이끌고 군사훈련과 수렵 등을 했는데, 이를 강무(講武)라 한다.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도비산(島飛山·해발 352m)도 강무지 중 한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1416년 2월 16일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훗날 세종대왕)과 함께 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비산에서 사냥몰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은 사냥을 끝난 후 충녕대군과 해미현에서 하루를 보낸 뒤 예산현 등을 거쳐 환궁했다고 한다. 태종이 강무지로 도비산을 택한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현리(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 왜구 침입이 잦아 이를 살피기 위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 1417년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성을 해미로 옮기고, 충청지역 방어를 위한 해미읍성(사적 116호) 축성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강무를 비롯, 해미읍성까지 이 지역이 당시 군사적 요충지였음 방증한다.

도비산 중턱에 '부석사'라는 절이 있다. 절 이름 유래는 이렇다. 의상대사와 그를 흠모한 '선모낭자'의 전설이 전해진다. 신라 28대 왕인 진덕여왕 4년 시기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그를 사모한 '선모낭자'라는 처녀의 얘기다.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모낭자'가 사랑을 고백했으나 의상대사가 이를 거절하고, 신라로 돌아가자 선모낭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선모낭자'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의상대사는 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만들기로 했고, 이곳 도비산에 절을 지었다. 동네사람들이 도비산에 절을 짓는 것을 반대했지만 의상대사는 절 짓기를 계속했다. 참다 못한 동네사람들이 쇠스랑을 들고 쫓아와 부숴 버리려 하고, 절을 불 태우려 했지만 갑자기 큰 바위가 공중에서 둥둥 떠오르더니 동네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모두 듣거라.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계속 방해하면 이 바윗돌로 너희들의 머리를 부수겠다"며 꾸짖었다. 이 광경을 본 의상대사는 '선모낭자'가 용으로 변신, 그 용이 다시 바위로 변해 자신을 도와준 것으로 생각했다. 이 바위는 날아가 절에서 보이는 바다에 떠 있으면서 절 짓는 공사를 지켜봤다는 것. 동네사람들은 이 바위가 물 위에 떠 있다 해서 '부석(浮石)'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절 이름도 그래서 부석사이고, 이 지역 이름도 부석면이다.

이 부석사가 세간에 관심을 받은 건 이미 몇 년 전이다. 절도범들이 일본 대마도에 있는 관음사 법당에서 불상인 '금동관음보살좌상'을 훔쳐 왔는데, 이 불상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 공방이 벌어 지면서부터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조선시대 약탈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일대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유추할 만하다.

부석사는 '금동관음보살좌상' 복장품에서 주성(鑄成) 결연문이 나왔는데, 조성연대로 볼 때 부석사의 것이라 주장했다. 문명대 동국대 교수가 번역한 결연문은 "부처님 말씀에 부처님의 설법에 의지해도 인연 없는 중생은 교화하기 어렵다고 했다. 제자들이 큰 힘을 함께 발원하여 부석사에 관음보살상 한 분을 주성하여 봉안하고 영원히 공양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법원의 재판 결과 1심과 2심의 판결이 엇갈렸다. 1심은 부석사의 손을 들어줬고, 2심은 부석사의 손을 외면했다. 2심 판결문을 보니 "1330년 고려시대 서주 부석사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부석사의 소유권은 인정되나 서주 부석사와 원고 부석사의 동일성, 연속성 유지 여부는 증거 미흡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결국 최종 판결은 대법원의 몫이 됐다.

며칠 전 부석사를 갔을 때 일주문 앞에 이런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상 제자리 봉안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현수막이 빛을 발하기 전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부석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래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누구 것이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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