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익수 사도 요한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방익수 사도 요한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조금 긴 시간 동안 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강아지가 나를 반기며 폴짝폴짝 뛰다가 그만 나에게 꼬리를 밟혔고 강아지는 '깨갱' 하고 아픈 신음 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나는 강아지를 안으며 '빠흐동'(pardon, 미안하다는 뜻의 프랑스어)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국의 의지가 처음 생긴 때였는데 그것은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사과의 표현에 물들어 있음에 대한 자기 반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 경험 때문에 바로 돌아오지는 않았고 그 이후 강아지 꼬리를 밟는 일도 일어나진 않았다.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서양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비교적 사과의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길을 비켜달라고 청할 때나 몸이라도 살짝 부딪히게 되면 'sorry'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온다. 일종의 습관화인 셈이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 부여가 없는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경우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본인에게 책임이 지워지는 경우에는 사과에 대한 표현이 달라지고 자기 잘못에 대한 인정을 회피하려 애쓴다. 그저 그러한 상황들이 유감스러울 뿐이고 자신은 마치 제삼자인양 말을 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화는 더 커지게 된다. 책임 추궁을 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미안하다, 이해 바란다' 정도의 표현만 들으면 될 일인데 '반드시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말테다'하는 오기까지 생기게 된다.

이에 비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과의 교육을 잘 받는 편인 것 같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해서 너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고, 진심으로 뉘우치니,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바란다'라는 정식으로 사과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차원의 일이지만 사과와 감사의 표시로 자동차 비상등을 열심히 사용하고 유튜브 등에도 사과 영상들을 보면 사과의 교육이 잘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하는 일의 무게가 달라질수록, 진실한 자기 반성과 사과가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가끔은 잘못을 받아들이고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끝끝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변명이나 거짓말로 무마하려다 일을 키우는 경우도 보게 된다. 순간의 곤경을 피하려다 더 큰 곤경을 자초하는 셈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지난 삶과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이라 착각하거나 다른 이에게 나를 향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나 작은 잘못을 하게 마련인데 스스로는 무결점하고 완전한 존재라 여기는 사람이 많은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해 더 경계하고 조심하며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한 법인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실수와 잘못을 더 많이 일으킨다.

구설에 자주 오르는 유명인들이나 정치인들을 보면 작은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것을, 그러면 대중이 너그러이 받아들여줄 것을 회피하고 모면하려다 더 큰 구설에 휘말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는데 어떨 때는 그런 모습들에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회피보다는 인정이, 유감 표명보다는 사과의 표현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 사람을 다시 보게 하는데 그런 단순한 진리를 왜들 모르고 있는지…

각자의 인생관은 모두 다르겠지만 적어도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는 슬기롭고 바르고 용감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어른들의 기본적인 삶의 지향점도 여기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겸손해질 줄 아는 사람이고,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고 참을 줄 아는 사람이며, 참으로 바른 사람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용서를 청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겸손하고 인내하며 용서를 청할 줄 아는 사람이 더 큰 사람이고 더 훌륭한 사람이다.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와 나라가 더 아름답고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 더 큰 사람, 더 훌륭한 사람들이 넘쳐나길 바란다.

방익수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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