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범 건양대병원 홍보실장
정인범 건양대병원 홍보실장

정기적으로 10년째 이어오는 부부 동반 모임이 있다. 고향과 직업, 취미나 생활환경도 모두 다른 12명 인생이 참여하고 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다들 바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매주 이어온 모임인데, 심심하고 한가롭다고 말 한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의 평범한 우리는 집안일과 직장일, 개인 사정과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에 쉴 틈이 없다. 금요일 저녁에 우리의 아지트 `다락방`에서 서로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지만, 어깨 위엔 주중에 쌓인 피로가 소복하다. 예민한 이 주임, 걱정 많은 장 팀장, 워크홀릭 김 과장 등 `휴식 결핍 환자`들이 오늘도 모였다.

그런데 오늘은 김 과장의 얼굴이 생기가 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사연이 궁금했다. 알고 보니, 김 과장은 맹장염으로 얼마 전 수술을 받았고 오늘 퇴원했다고 한다. 배도 아팠을 것이고, 수술 부위도 좀 불편해야 일반적인데, 병원을 갓 나온 사람 얼굴에 광채가 났다. `이 친구가 이렇게 잘 생겼었나?` 신기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수술받고 병실로 올라온 후로 전화도 꺼놓은 채 계속 잠만 잤다는 것이다. 3일을 폭 자고 나니 몸이 가볍고,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고 한다. `며칠을 굶었는데도, 힘이 나네요`. 입원해서 수술받느라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이 무색했다. 이렇게 광나는 사람이 10여 년을 잿빛으로 살아왔었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맹장염이 사람을 업그레이드했다. 아니, 사람 하나 살렸다.

김 과장이 달려온 10여 년 같이 우리는 매일매일 쉼이 부족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김 과장뿐만 아니라, 한국의 평범한 중년이라면 많이들 그럴 것이다. 매일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과를 열심히 달린 후 밤에는 꿀잠에 드는 김 과장도 십중팔구 `휴식 결핍`이다. 머리만 대면 바로 꿀잠에 드는 것인지,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드는 것인지 잘 분간 해봐야 한다. 밝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 중에도 매일 피로를 차곡차곡 적립하는 사람들도 많다. 차라리 매사에 소극적이고 항상 어딘가 아픈 `그` 사람의 불면증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매일 같은 훈련을 무리 없이 하던 운동선수 중에, 어느 날 별다른 충격도 없이 뼈가 부러지는 일이 드물지 않다. 매일 매일의 손상이 누적되어 발생하는 `피로 골절`이다. 가느다란 물줄기에 어느 날 갑자기 바위가 깨지는 격이다. 나도 김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다. 커피를 3잔씩 마시며, 일과 연구에 몰두하던 5년 전 주말 저녁이었다. 할 일을 다 해치우고 아드레날린 충만한 채 기지개를 피는데, 왼쪽 부분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시야장애였다. 눈도 비벼보고, 한 쪽씩 감았다 떠보고 해봤는데, 여전히 왼쪽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아니라 뇌 신경 문제임을 짐작했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는 듯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를 급히 불러, 응급실로 달렸다. 부랴부랴 뇌 MRI를 촬영하고, 출혈이나 경색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입원 후 아내를 돌려보내고, 조용한 병실 침대에 홀로 누워있으니 참 편안했다. 우리 집 침대보다 더 편안한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새벽 두 시처럼 깊은 잠에 잠겼다. 자고 또 자고 하다가 며칠 만에 눈곱을 떼어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신혼여행 이후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름 보람차게 달려왔던 나날 동안 나는 열심히 일도 했지만, 한편으론 심신에 차곡차곡 피로를 적립했던 것이다.

우리는 쉬어야 한다. 몸도, 머리도, 마음도 틈틈이 쉬어야 한다. 잠은 부족하지 않게 깊이 자고, 휴식시간은 온전히 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피로골절`이 생길 수 있다. 일은 대강하고 놀라는 말이 아니다. 일할 때는 치열하게 열심하고, 쉴 때는 쉬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과 휴식은 균형이 필요하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너무 바빠서 쉬지 못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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