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덕향교는 조선시대 나라에서 세운 국립학교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군·현마다 향교를 세웠다. 세종실록(지리지)은 당시 전국 329개 고을에 향교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향교는 군·현의 존폐와 운명을 같이했다.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폐교되고, 군·현이 생기면 향교도 세워졌다. 현대에도 향교가 세워졌다. 강원도의 동해향교는, 1995년 동해시가 발족되면서 창건되었다. 현재 전국의 향교는 235개이다.

우리나라의 향교는 대체로 전당후묘(前堂後廟)와 전묘후당(前廟後堂)의 형태다. 구릉지는 전당후묘로 앞에 강당(명륜당), 뒤에 사당(대성전)이 있다. 평지는 전묘후당으로 배치한다. 이는 선현의 위패를 윗자리(上席)에 봉안하는 예법이다. 회덕향교는 낮은 구릉지이므로 강당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에 있다. 대성전은 툇마루를 둔 개방형이다. 대성전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기숙사이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회덕향교도 여느 향교처럼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어서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말해준다. 누구든지 하마비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있고, 또 입덕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을 돌아가면 아홉 계단 위에 내삼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해야 대성전 곧 사당에 이른다. 삼문의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으로,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석전대제 등 특별한 제향의식이 아니면 열지 않는다.

회덕향교의 건립 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대부분의 향교가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으므로 141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0년경 중건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 1871년의 `교궁중수관문`에 의해 1872년 중수한 건물로 보인다. 고종 8년이던 1871년에는 전국에 47개 서원만 놔두고 모든 서원에 철폐령을 내렸다. 이를 `신미존치47서원`이라 부른다. 이때의 기록들이 현판으로 명륜당에 걸려 있다. 향교출입은 `동입서출`이다.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나온다. 내삼문을 오르내릴 때는 `섭급취족(涉級聚足)`이다. 동쪽계단은 오른발을 먼저 디디고, 왼발을 모아디디면서 한 계단씩 오른다. 서쪽계단은 반대로 한다. 회덕향교는 대전 대덕구 지원으로 상시개방하고, 해설사도 배치했다. 누구든 어느 때고 와서 섭급취족의 예법도 익히면 좋은 향교체험이 될 것이다. 김정곤 향토사학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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