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김호연재 편지
김호연재 편지
"문안 알외압고 / 송담댁 죵 오와날 / 하셔 밧자와 보압고 / 든든 반갑사오며 / 그 때 긔운 평안하오신 문안 아압고 / 더옥 못내 알외오며 / 인매 그리 만히 싸히압 어득 심난하야 디내오시난가 시브오니 / 하 졍애 념녀 가이 업사와 하압나이다 / 보내오신 상어난 밧자와 반찬에 쓰압고 못내 알외오며 / 알외압기 극히 어렵사오나 / 쟝이 떠러디와 졀박하오니 / 콩 서너 말만 엇자와 조쟝이나 다마 먹사오랴 하오대 / 알외압기를 젓사와 하압나이다 / 감하오심 젓사와 이만 알외오며 / 아마도 내내 긔후 안령하오심 바라압나이다 을유 납월 십사일 차생뎨 쳐 김 샹셔" (송요화 부인 김호연재가 시숙 송요경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을유년(1705) 12월 14일에 제수 김호연재(1681-1722)가 시숙 송요경(1668-1748)에게 보낸 것이다. 김호연재는 당시 제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는 시숙에게 "장이 떨어져 절박하니 장 담가 먹게 콩 서너 말만 보내 달라"는 다소 절박한 사연의 편지를 띄웠다. 이렇게 절박한 편지는 사실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할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어렵다면 어려운 관계일 수 있는 시숙에게 사연을 보냈다는 점이 의아스럽다. 호연재의 남편 소대헌 송요화(1682-1764)는 과거 급제를 위한 공부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신혼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연재는 1699년 19세에 송요화와 혼인하여 28세에 첫아들 익흠을 낳았다. 혼인 한 지 9년 만의 일이다. 호연재는 남편의 부재 속에 큰 집안 살림을 도맡아 처리해야만 했다. 젊은 새댁의 마음고생과 고독, 애잔함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 집안의 가난은 호연재 사후 송요화의 후취 아내가 된 밀양박씨(1700-1737) 대에도 여전하였던 것 같다.

밀양박씨 역시 " ……꿀은 말 엿되를 가디고 / 닐곱 번 큰 졔사와 / 여섯 번 차례와 / 이월 생신제와 / 그 몃 번을 썼관대 모자랄가 시브압 / 게셔 오셔도 근심을 하 계워 하오시며 / 호말이라도 근심을 더러 드리압쟈하고 / 사사로이 돈 두 냥을 겨유겨유 꾸내여 / 꿀 한 냥 깨 한 냥을 파랏삽더니마난 / 그도 다 쓰이고 기름도 졀박하고"라는 편지를 쓰고 있다.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있는지 수신자는 자세하지 않다. 박씨는 제사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정과를 만들기 위해 없는 돈 두 냥을 겨우겨우 빌렸다. 빌린 돈으로 꿀과 깨를 한 냥씩 샀더니 돈은 벌써 다 떨어져버렸다. 기름도 없어 사야 할 형편인데 말이다.

송요화 집은 종들이 많아 그 수효를 다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한다. 1729년에 작성된 이 집안의 호구단자에 의하면 노비가 53명에 달하였다. 이 정도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면 전답도 그에 못지않게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여성들은 한결같이 가난과 씨름하였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흉년과 기근, 전염병에 무방비 상태였던 조선시대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중소기업을 방불케 하는 식솔들의 입은 오히려 커다란 부담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실, 굶주려 죽은 인구가 적지 않았다.

호연재는 여러 차례 쌀을 빌리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삼산(지금의 보은) 군수에게 쌀을 빌리며 쓴 시는 애써 `호연(浩然)`을 강조하였다. 한 편의 시 속에 다섯 번이나 호연이라는 단어를 썼다. 호연으로 애써 자신을 무장하며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다. 사람을 대할 때 덕(德)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지 의식(衣食)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였다. 안빈낙도(安貧樂道)·안빈호학(安貧好學)을 실천한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 그대로이다. 요즈음 우리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배짱이, 풍요로운 정신세계가 아름답다.

맹자는 일찍이 선비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말했다. 일반인들은 생활, 곧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늘 변함없는 마음을 갖기 어렵고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명언이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삶. 정신보다는 물질을, 내면보다는 외양을 추구하며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사회현상과 사람들을 보게 된다.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조선에서 온 두 통의 편지를 보며, 새삼 안분(安分)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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