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1939~)

빨리 크고 싶다

네 살 손자의 말

빨리 크고 싶다

뒷밭 겨우 싹 터 오른

해바라기의 초록 말

둘 다 방금 싹 터 오른

초록 말

빨리 크고 싶은 말

초록으로 달리고 싶은 말

걱정들 말거라

손자야 해바라기야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들

학교 가서 소리소리 읽고 싶은 국어 책

반짝반짝 닦고 싶은 유리창

쑥쑥 자라 올라

만지고 싶은 앗 뜨거!

햇살 둥근 얼굴

손자야 해바라기야

금방이란다

서둘다 넘어지면

무르팍 피날라

할아버지 무르팍엔

아직껏 흉터 있단다

칠순에 이른 할아버지가 네 살 손자에게 보내는 이 지극한 사랑. 아하, "빨리 크고 싶다"는 말.

세상 모든 어린 싹들이 이 말을 먹고 자랐다. "빨리 크고 싶다"는 이 말은 곧 어린 생명을 키우는 힘. 어찌 이 말없이 땅속에 묻힌 작은 씨앗 싹터 오를 수 있으며, 메마른 화살나무 가지도 아기 젖니처럼 새싹 내밀 수 있으랴. 이 말 입에 올리지 않고서 어찌 우리 눈부신 성장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으리. 그런 즉 모든 인류를 이끌어온 동력은 바로 이 말에 집약돼 있는 것.

할아버지에게는 방금 싹터 오른 해바라기와 손자가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다. 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들, 소리소리 읽는 국어 책, 반짝반짝 닦는 유리창, 너희들이 쑥쑥 자라 올라가 만지고 싶은 저 뜨거운 태양. 새싹들 "앗 뜨거!" 파닥 데인 손을 떼는 반사작용. 그때 하늘의 태양은 까르르르르 떼 웃음을 쏟아놓았으리라. 세상의 어린 싹들 우쭉우쭉 자랐으리라.

할아버지 이르는 "금방이란다", "무르팍 피날라"는 사랑의 말, 서둘지 마라는 마음. 아직 생을 모르는 손자에게 무르팍의 흉터를 내보이며 이르는 할아버지의 이 느긋함? 어쩌면 그것은 손자가 클수록 칠순의 할아버지는 그만큼 더 석양 쪽으로 다가가야 할지니. 그러기에 할아버지 심정은 네 살 손자의 예쁜 표정을 영원히 보고 싶은 것. 지금의 기쁨 이대로 누리며 손자의 재롱 맞보고 싶다는 마음 절절한 것이렷다! 시인·한남대 문창과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최정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