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김호연재 편지 원문.
김호연재 편지 원문.
"요사이는 모시고 잘 있느냐? 지난번에 보낸 글씨 보고 잘 있는 줄 알고 든든하고 기쁘나 언문 서너 줄 쓰기 무엇이 싫어 갖추어 진서로 하였으니 밉고 가증스럽다. 진행(晉行)의 병은 요사이 어떠하냐? 사응(士鷹·김호연재 從弟)이 가서 모두 든든하게 지내는 일을 보는 듯하고 기특하다. 어리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방탕하게 보내지 말고 글이나 보아라. 파주의 기별은 다시 못 들었을 것이니 오죽 염려를 하겠느냐? 보는 듯하다. 은집의 궂은일은 매우 참혹하니 무슨 말을 하리? 명행(明行)의 일은 매우 잔인하여 불쌍불쌍하니 차마 잇지 못 하겠도다. 나는 겨우 지내나 여기(려氣)가 가라앉아 그칠 기약이 없으니 절박하다고 말하기 끝이 없으며 지척이라도 살았다가 만나볼까 싶지 않아 마음이 애가 끊어지는 듯한 것이 한이 없다. 총망하여 다 못 적노라. 내내 무사히 있거라." (고모 김호연재가 친정 조카 김겸행에게 보낸 답장 편지)

이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①부모님 모시고 잘 있느냐? ② 지난번 너의 편지를 받고 잘 있는 줄 알아 든든하고 기쁘다. ③ 한글로 편지 쓰기 싫어서 진서(한문)로 쓴 것이 밉고 가증하다. ④ 진행(晉行)의 병은 좀 어떠하냐? ⑤ 어리지 아니한 것들이 모여서 방탕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글을 읽어라. ⑥ 명행(明行)의 갑작스런 죽음은 애처롭고 불쌍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 ⑦ 나는 겨우 지낸다. 유행하는 전염병이 그칠 기미가 기약이 없으니 절박하다. ⑧ 가깝게라도 살았다가 만나볼까 싶지 않으니 마음이 애가 끊어지는 듯 슬프기 가없다. 바빠서 다 못 쓴다. 무사히 있거라.

김호연재(1681-1722)가 친정 조카 김겸행(1696-1770)에게 보낸 이 한 통의 답장 편지에서, 조카의 갑작스런 죽음(김호연재의 큰 오빠 김시택의 아들 김명행은 1678년에 태어나 1718년에 졸하였다. `숙종실록` 44년(1718) 4월 18일 기록에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돌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3068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라고 되어 있다)과 병환 걱정, 글 읽기 권유, 자주 만나지 못해 애처로운 마음 등 혈육에 대한 곡진한 감정을 두루두루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에 관련된 편지는 한글 전용 원칙이 있었다. 여성이 발신자이든 수신자이든지 간에 모두 한글로 썼는데, 김겸행은 고모인 호연재에게 한문으로 써서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호연재는 이 점에 대해 `밉고 가증하다`는 다소 강경한 일침을 가하였다.

편지 끝부분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침식할 기약이 없으니 절박하노라"라는 기록과 "지척이라도 살았다가 만나볼까 싶지 않아 마음이 굿브기 가이 업다"는 기록은 요약하면 `역병으로 인해 매우 절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생각하면 애가 끊어지고 타들어가는 심정이다`라는 것이다.

숙종 말기에서 경종 초에 충청도에 역병이 창궐하였는데, 1722년 5월 15일 42세의 짧은 생애를 갑작스럽게 마감한 김호연재의 사인도 역병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듯 한글편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 손자, 사위, 조카라는 다양한 모습의 남성들이, 상대 여성들에게 감정의 여과 없이 진솔하게 자신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집안 자녀의 출생과 교육, 혼사, 살림 경제, 선물, 병환, 전염병, 장례, 제사, 안부, 노비문제, 재산관리 등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 주체 또는 가족 간의 일상사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찍어 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편지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감사하는 마음과 더러 발생한 오해나 안부 등도 전화, 이메일, 휴대전화상의 문자메시지로 바로바로 소통하고 만다. 짤막한 즉답을 주고받으면서 감정을 소비한다. 그러나 편지는 좀 다르다. 마치 전통시대 우리 어머니들이 바느질 한 땀 한 땀으로 가족의 옷을 만들듯이, 자연에서 온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글씨를 수놓는 행위라고나 할까. 편지는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쏟아내기에 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따뜻해진다. 새해에는 가족 간 사랑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우체통에 넣어 보내는 설렘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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