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순<당진교육지원청 교육장>

교직을 시작하고 몇 년 후 붓글씨를 배운 적이 있었다. 글씨를 잘 써보고 싶어 찾아간 나에게 서실 선생님은 일주일간 줄긋는 연습만 시켰다. 첫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음날은 위에서 아래로, 그 다음날은 원을….

처음엔 어린 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교본을 보며 글씨를 연습하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곧 줄긋는 일에 집중하게 되고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사실 시시하게 여겼던 그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붓을 제대로 잡는 일에서부터 손가락과 팔과 어깨의 힘을 고루 이용하여 붓 끝을 가운데로 오도록 하다 보면 온몸에 땀이 나곤 했다.

그런데 정년 후 한국화를 시작한 선배도 옛날 글씨를 배우던 나처럼 요즘 줄긋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글씨든 그림이든 그 기본은 필력이고 줄긋기는 필력을 기르는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단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탄탄한 바탕 위에서 예술성도 창의성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예술성이나 창의성이란 어떤 것을 독창적으로 생각해내거나 만들어내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있던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혹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것들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거나 관련지어 새롭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 즉 일상에 흔히 접하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 그리고 유연한 사고를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게 있다. 바로 튼튼한 기초지식을 갖추는 일이며 기본원리를 체득하는 일이다. 창의성이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본 토대 위에 새롭게 세워지는 생각이기 때문에 기초지식이 없이는 공상에 불과하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도 기초를 닦고 뼈대가 세워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기초와 기본이 서 있지 않는 창의성은 뼈대 없는 건축물과 같다고나 할까.

기본을 강조하는 예화 중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제지간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붉은 소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어느 소가 먼저 일어날지 내기를 하였다. 점괘를 짚어본 사명대사가 “붉은 소가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니 서산대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나고 난 뒤에 붉은 소가 일어날 걸세” 하였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소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붉은 소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명대사가 “점괘가 火자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니 서산대사가 말하기를 “물론 나도 火자가 나왔지. 하지만 불이 나려면 연기부터 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서산대사는 결과로 본 불의 외형적 특성뿐 아니라 불이 일어나는 기본이치를 알았던 것이다.

학교는 기본을 가르치는 곳이다. 한 민족이 교육이념을 달성하기 위하여 학습해야 할 핵심을 정선하여 학생의 발달단계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는 지식의 양이 늘어가고 사회가 다변화하는 속도에 당황하고 때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기본이 더욱 중요하다. 학교는 기초·기본교육을 충실히 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밑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밑바탕은 무엇인가? 많은 요소 중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보면, 건강한 몸과 정신, 정직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 뚜렷한 목표의식과 자아성취,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학습력(혹은 학습방법)과 융통성 등일 것이다. 현대가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요구한다고 해서 기본을 무시하고 기교에 치우친다면 결코 그 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서 그러하듯이 교육에서도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학생들이 꿈, 혹은 희망을 갖고 그 방법을 찾도록 도우며, 충실한 교과활동과 함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독서와 외국어 학습을 통하여 그 꿈을 이루어나가도록 도와야 하겠다. 지희순<당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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