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공대생을 아들로 둔 한 학부모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국내외에서 원자력계가 각광을 받고 있다는데 실제 원자력 쪽으로 진출하면 전망은 어떤지, 연구원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보수는 어느 정도인지 무척이나 구체적인 질문을 해왔다. 지난 십수 년간 그늘에 가려 있던 원자력에 대한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어 기뻤지만, 말로만 듣던 ‘헬리콥터 부모’를 목도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필자는 대학 학부와 석사, 박사 과정 모두 원자력 공학을 전공했다. 제 자랑 같아 뭣하지만 당시 원자력공학과는 이 나라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곳이라는 턱없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필자를 비롯한 선후배들을 원자력 공학으로 이끈 것은 맹세코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 산업화를 이루기 위한 인프라를 온 국민의 피땀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었지만, 이를 돌릴 에너지 자원이 전혀 없는 척박한 땅 위에 원자력으로 기적을 완성해 보자는 막연하나마 가슴 벅찬 포부에 이끌렸을 뿐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자부심과 포부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문, 모든 공학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원자력 공학은 돈과 명예라는 ‘짧은 눈’으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20~30년을 앞서가고 있는 원자력 선진국들을 뒤쫓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학위를 받고 연구소에 와서는 사정이 나아지려니 했지만, 핵심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외국 연구소에 파견 나가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불을 밝히다 경비에게 쫓겨나고, 난방이 되지 않는 연구실에서 시린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설계 도면을 고쳐 그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날들을 웃으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배짱에 가까운 신념, 반드시 해야 하고 꼭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말 UAE에 수출한 상용 원전 APR-1400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우리 원자력계가 쌓아온 30여 년 세월의 총합이다. 30년이라면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온 공학도가 남은 평생을 걸어야 하는 시간이다. 평생을 하나의 목표에 봉사하는 수백, 수천 명의 노력이 모여야 비로소 하나의 목표가 눈앞에 다가온다. 이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2011년 현재 원자력계 앞에 놓여진 가장 큰 과제는 원자력 에너지의 패러다임을 혁신적으로 바꿀 미래 원자력 시스템 개발이다. 사용후핵연료의 부피와 독성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는 파이로프로세싱 기술 완성과 소듐냉각고속로(SFR) 개발, 수소경제 시대를 선도할 원자력 수소 생산 시스템 개발은 당장의 명예와 돈을 좇는 자가 이룰 수 있는 목표들이 아니다. 오는 2030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 오로지 한 우물을 파겠다는 다부진 집념을 가진 이들만 목표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원자력은 부존자원이 없는 이 나라의 에너지 수급을 책임짐으로써 세계사에 없는 급속한 경제 도약을 가능케 한 ‘산업의 쌀’이자 거름 역할을 해왔다. 에너지 자립을 위한 원자력의 역할은 원자력 발전을 처음 시작한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이에 더해 우리 원자력계는 내수산업의 틀을 뛰어넘어 수출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 건설사업 수주와 UAE 상용 원전 수주를 시작점으로 삼아 상용 원전과 연구용 원자로, 중소형 원전과 원자력 단위 기술들을 세계 각국에 지속적으로 수출함으로써 원자력을 수출산업화해서 차세대 국가성장동력산업으로 만드는 것이 지금 원자력인들이 꾸고 있는 또 다른 꿈이다. 이 꿈을 위해 밤을 낮 삼아 설계 도면을 그리고, 전력을 아끼기 위해 심야 시간을 이용해서 실험 장치들을 가동하고 있다.

지금 원자력계에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인재다. 수많은 기술적 도전들을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능력이 뛰어나고, 포부가 당당하고, 열정으로 가슴이 뜨거운 인재가 필요하다. 인재가 없이는 원자력 기술강국의 꿈은 허상일 뿐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원만 해도 과거 원자력 연구개발의 주역이었던 중진 연구자들이 앞으로 다가올 10년간 400명이 넘게 정년퇴직을 할 예정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들의 지식과 경험을 전수받아, 앞으로 30년을 책임질 젊은 피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원자력 공학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당장의 이익과 명예보다는, 훨씬 더 먼 미래를 향한 포부와 비전으로 머리와 가슴을 채우기를 바란다.

정연호<한국원자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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