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에 한국원자력연구원의 문을 두드렸으니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몸담은 지 30년이 조금 넘었다. 지난해 11월 말 원장에 취임해 평생직장의 경영을 맡게 돼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행운이지만 과학기술계가 변화하는 시기에 키를 잡아 실로 어깨가 무겁다. 과학기술 컨트롤타워 개편, 이와 맞물린 출연연 통폐합, 연구개발특구 추가 지정 등으로 필자뿐 아니라 대덕연구개발특구 과학기술인들의 마음이 가볍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두 달여 원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본 대덕특구는 여전히 희망이 넘치는 곳이라 말하고 싶다. 이유 없는 낙관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가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진보와 국가경제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이 대덕특구에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얘기부터 하자면 지난해 말 SMART(스마트) 원자로의 표준설계인가(SDA)를 정부 당국에 신청했다. 많은 언론이 주목해 줬듯 세계 최초로 일체형 원자로 개발을 매듭짓고 인허가 절차에 돌입함으로써, 2050년까지 약 39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소형 원전 세계 시장 선점을 향해 더욱 고삐를 죌 수 있게 됐다. SMART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지난 1997년부터 개발해 온 100퍼센트 우리 독자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원자로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시장성이 없다’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건 ‘할 수 있다’는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그 마음은 30여 년 전 허허벌판인 이곳에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운 선배들이 우리에게 심어 줘 이제는 뼛속까지 스며든 대덕특구의 정신이다.

원자력연구원뿐 아니라 역시 대덕특구의 일원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얼마 전 세계 최초로 4세대 이동통신 기술 시연에 성공했다는 소식 또한 너무나 반갑다. 원자력연구원이 지난해 UAE 원전 수출을 가능케 한 원자력 기술 자립의 주역이라면, 전자통신연구원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IT 강국 코리아를 만든 주인공이다. 특히 이번 4G 프로젝트는 국내 10여 개 업체가 개발 단계부터 참여해 출연연과 기업의 이상적인 협력 구조를 통해 이뤄낸 것이라 더욱 의미 깊게 평가된다. 흔히 융복합의 부재, 산학연 협력의 부족 등을 대덕특구의 약점 내지 문제점으로 꼽지만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원자력연구원만 해도 SMART는 개발 초기부터 한국이 세계적 기술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해수담수화 기술을 염두에 두고 개발한 원자로다. 개발 도중에 협력 방안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착안부터 산-연 협력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변수로 고려한 것이다. 수소 경제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개발 중인 초고온가스로 역시 원자력연구원이 원자로와 핵연료 개발을 담당하고,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원자로에서 발생한 열을 이용해서 수소를 생산하는 열화학 수소생산 기술 개발을 맡는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출연연과 출연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대덕특구가 어떤 곳인가. 원자력 분야에서 한국표준형원전 개발과 핵연료 국산화, 원자력 시스템 사상 첫 수출, 전자통신 분야에선 전자교환기 국산화와 D램 반도체 개발, CDMA 상용화, 항공우주 분야에서는 통신방송위성과 다목적 실용위성 개발 등을 통해 과학입국을 가능케 한 수많은 연구개발 성과들을 쏟아낸 곳이다. 이처럼 빛나는 성과에 도취되거나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도전 정신이 살아 넘치는 곳이다. 비단 출연연뿐 아니라 출연연에서 파생된 연구소기업과 벤처기업 등 기업 생태계가 전국 어느 곳보다 건전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출범과 출연연 법인격의 변경, 연구개발특구 추가 지정 등 변화의 바람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것은 대덕특구가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국가와 국민이 요구하는 지속가능한 성장,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친환경 청정 기술 개발의 중심 역시 대덕특구다. 30여 년 출연연에 몸담아 온 과학기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소신은 국가가 연구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면 줄수록 과학기술인들이 국가 즉 국민들에게 더 큰 결과를 안길 수 있다는 것이다. 국과위 출범을 정점으로 하는 과학기술 거버넌스 개편도 궁극적 목적이 연구원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부디 새로운 과학기술 행정체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또 다른 도전을 꿈꾸는 대덕연구개발특구의 많은 연구원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연호<한국원자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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