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눈물은 그저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다. 눈물의 성분은 과학적으로 98%가 수분이고 약간의 염분, 단백질, 지방화합물이 함유되어 있다지만, 순수하고 맑은 눈물 한 방울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감정의 순간들, 북받치는 서러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잊지 못할 추억과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것이 참된 눈물이다.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그 마을 사람들이 쫄리 신부님이라고 불렀던 한 남자. 마흔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이태석 신부(1962-2010)의 죽음을 접하고 흘린 눈물에는 그런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눈물샘이 말라버린 마을부족, 원래 강인하고 용맹했던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라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먼 타국 한국에서 온 한 사람의 따뜻한 사랑 앞에 울고 말았다.

그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가 관객 30만 명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필자도 그 영화를 보고 그의 아름다운 삶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서 의과대학을 마쳤다. 의사로서 안락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더 어려운 처지의 상처 받은 영혼들을 돕겠다는 큰 뜻으로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택했다.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가장 열악한 아프리카 톤즈 마을로 파견을 자청하여 의료와 청소년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벽돌을 찍어 병원을 짓고 한센병을 비롯한 많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보살폈다. 학교를 세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음악을 가르쳐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소진하고 자신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톤즈 사람들이 그를 눈물로 추억하는 것은 그가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눈높이로 내려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픈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가 암 투병 중에 쓴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우리의 삶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이므로 어려울 때 서로 의지하고 넘어질 때 서로 일으켜 줘야 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이 신부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감동의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가 베푼 사랑과 헌신이 크고 숭고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부끄러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를 뛰어넘어 인간이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람답게 더불어 산다는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순수한 가치가 많다는 평범한 진실을 조용하게 그러나 천둥처럼 큰 울림으로 일깨워 주었다.

그가 일찍이 작곡한 ‘묵상’이라는 성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묻고 있다.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에서 응답을 얻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헐벗고 병든 사람들의 곁으로 갔다. 최근 정치쟁점이 된 국책사업에 대하여 따뜻한 안방에 앉아 뜬금없는 이념적 언동이나 일삼는 일부 문제 사제의 행태와 너무나 대조가 되는 일이다.

이 신부는 사제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으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지으셨을까, 성당을 지으셨을까” 자문하면서 먼저 학교를 지어 어린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르쳤다. 특히 음악교육에 대한 그의 재능, 혜안과 노력은 놀랄 만하다. 독학으로 악기를 배워 수단에서 최초로 창단한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경이롭기만 하다. 가히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할 만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강조되고 나눔과 베풂의 리더십, 긍정과 겸손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요즘에는 ‘하늘은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제가 힘을 얻고 있다. 먹이를 잡아먹고 흘리는 ‘악어의 눈물’이 횡행하는 거짓의 시대에 해맑은 눈망울을 가진 톤즈 소녀의 뜨거운 눈물이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슈크란 바바(하느님 감사합니다)를 되뇌인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 그 눈물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눈발이 날리는 오늘, 시인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가 생각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법무법인 충정 대표변호사·전 서울중앙지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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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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