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중)

거리에 낙엽이 뒹구니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스산하기 마련인 11월 중순인데도 이곳 토론토는 여전히 한낮 햇살이 따스하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기도처럼 남국의 마지막 따스한 햇살 아래 탐스런 포도가 탱글탱글 영글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포도주(와인)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포도는 온대지방에서 잘 자라지만 특히 여름이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은 지중해성 기후에서 양질의 와인용 포도가 생산된다. 적(赤)포도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지중해 연안에서 풍부한 당(糖)과 진한 색깔을 낼 수 있고 화이트와인의 원료인 청포도는 약간 서늘한 속에서 자라면서 신맛이 적절히 배합돼야 좋다.

이런 조건을 고루 갖춘 곳이 프랑스로, 북쪽지방의 청포도와 남쪽의 적포도는 와인용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와인의 질과 양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다. 이밖에 칠레, 호주, 미국 캘리포니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와인 등도 손꼽힌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나이아가라도 와인 산지로 유명하다.

와인은 ‘신이 머금은 이슬’로 찬사받고 있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와인을 마셔라, 시를 마셔라, 순수를 마셔라”라고 노래했고 빅토르 위고는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고 찬양했다.

와인은 포도를 원료로 발효시킨 술이긴 하지만 이를 그대로 포도주라 하면 왠지 투박하다. ‘와인’이라고 해야 세련되고 우아하게 느껴진다. 와인은 종류도 많고 예법도 까다롭다. 먹고 마시는 음식치고 와인처럼 종류도 다양하고 예법 까다로운 음료도 드물 것이다. 와인만 전문으로 공부하는 칼리지까지 있으니.

그러나 와인도 술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13도 내외)가 약해 소주 같은 술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마냥 들이붓는 경향이 있다. 필자도 와인을 물 마시듯 들이켜다 보면 어느덧 대취할 때가 많다. 와인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소치다.

-날씨 좋았던 올해 포도농사 풍년

-와인 업자들 고품질 기대로 들떠

와인은 세계 10대 건강식품에 포함될 만큼 인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음료다. 고대(古代)부터 여러 질병치료 목적으로 포도주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특히 레드와인에 함유된 ‘폴리페놀’은 심장병을 예방하고 노화를 방지하며 암, 치매, 뇌졸중의 예방에도 유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인을 즐겨 마시는 프랑스인들이 다른 서구인보다 심장병 사망률이 낮다는 사실이 보고되기도 했다.

와인은 무엇보다 분위기로 즐기는 술이다. 은은한 조명 아래 정다운 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주고받는 한잔의 와인은 낭만적이고 사교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만찬 테이블에는 한국기업이 미국 캘리포니아 포도밭에서 생산한 와인 ‘온다 도로(Onda d’Oro)’(황금 물결)가 올랐다고 한다.

와인은 절제의 술이기도 하다. 식사 때 곁들이는 한두 잔의 와인은 알코올 욕구를 해소시켜주기 때문에 폭음과 과음을 막아주는 데 도움이 된다. 와인에는 긴장완화를 돕는 성분도 있어 하루일과를 마친 후 혀끝을 적시는 와인 한잔의 느긋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세계적 와인 산지인 온타리오의 포도재배 농가들이 올여름 완벽에 가까운 기후조건으로 그 어느 해보다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돼 축제분위기에 싸여 있다. 나이아가라의 와인 생산자들은 “지난 25년 동안 이렇게 포도농사에 완벽한 날씨는 없었다”고 한다. 풍부한 일조량과 적당한 강수량에 병균감염 징후도 없었다.

온타리오 와인업계는 지금 포도를 수확하느라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좋은 기후 덕분에 각 농가가 취향에 따라 수확시기를 결정할 수 있으며 생산자별로 많은 ‘작품’이 탄생할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

필자가 캐나다에 살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즐기는 술의 종류다. 한국에서야 당연히 소주를 마셨지만 이곳에서는 와인으로 바뀌었다. 겨울이 긴 캐나다에서는 와인이 특히 잘 어울린다. 눈 내리는 겨울밤, 벽난로 옆에 앉아 아내와 기울이는 한잔의 와인에 포근한 사랑이 음악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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