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스위프트란 소설가는 ‘약속과 파이의 껍질은 깨지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정말 어렵다는 교훈적 메시지가 담긴 경구다. 하지만, 사람들은 깨지기 쉬운 줄 알면서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약속을 한다. 미리 깰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약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인(哲人) 사르트르는 ‘약속은 자기구속’이라고 했다. 약속 불이행에 따른 책임은 없다 해도 자신을 괴롭히는 짐이 된다는 의미다. 미지불의 부채나 다름이 없음이다.

약속 중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은 자신과의 약속이다. 상대방이 없기에 곧잘 망각하거나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정치인의 약속도 안 지켜지는 약속의 범주에 든다. 오죽했으면 국어사전에 공약(公約)이 공약(空約)과 함께 올라 있을까. 국민이 정치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리는 가장 큰 이유도 식언(食言)과 허언(虛言)을 밥 먹듯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 지키기를 철칙으로 살다 간 한 도공이 있었다. 약속 안 지키기를 미덕처럼 여기는 정치인들은 새겨들을 만한 얘기다. 그는 가마에 불을 지필 때마다 깜짝 놀랄 만한 옥동자 같은 명작이 나오길 바랐다. 하지만, 부질없는 욕심이란 것을 깨달은 후 수수하게 생긴 아들이나 딸이면 족하다고 여겼다. 모자란 구석이 있더라도 심성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주위에 해나 끼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물레질하고 가마에 불을 땠다. 그러나 수수한 기물을 얻는 것도 맘처럼 쉽지 않았다. 구운 도자기를 꺼내는 날이면 그는 불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가마 앞에서 어김없이 도자기 깨기 의식을 시작했다. 엄숙한 분위기다. 망치를 쥔 팔의 핏줄이 꿈틀하더니 사정없이 내려친다. 이내 도자기는 사금파리로 변한다. 사금파리가 수북이 쌓일수록 도공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묻어난다. 도공의 도자기 깨기는 자신과의 약속 지키기다. 언제 나올지도 모를 옥동자 같은 명작을 기다리면서 치열하게 약속을 실천했다. 평생 빚은 도자기 중 얼추 80%는 망치의 제물이 됐을 것이다.

도공과는 대조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민과 약속한 행정도시원안 추진을 어떻게 하면 깰까 골몰하는 모양이다. 여당도 한몫 거들고 나섰다. 이미 대전 근현대사박물관 건립 공약을 슬그머니 저버리고 서울에 착공, 재미를 보더니 행정도시 원안 추진 공약 깨기를 2탄으로 삼은 듯하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시 ‘행정수도 이전을 못 하게 하려면 군대라도 동원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한 행정수도 건설 골수 반대론자다. 하지만, 당선이 먼저였다. 행정도시 원안 추진 약속을 하지 않으면 충청도 표가 날아가 낙선을 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일관된 신념이지만 당선을 위해 내키지 않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당선이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만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대를 할 수는 없는 처지다. 여당의 움직임에 내심 기대를 걸었지만, 성에 안 찼다.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충청도 출신 정운찬 총리 내정자가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게 아닌가. 행정도시 수정론을 제시하면서 작심하고 이 대통령의 공약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결국, 충청 출신 재상을 내세워 행정도시 공약을 뒤집는 현대판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충청 총리 카드로 충청 민심 얻고 행정도시 공약 피해갈 비상구까지 마련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행정도시 문제는 대통령이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직접 나서는 게 옳다. 대타 세우기 식으로 지원사격을 받아도 약속을 어기는 것은 대통령이다. 행정도시 건설을 변질시키려는 당리당략의 접근방식도 경계해야 한다. 본질과는 무관하게 소모성 논쟁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대통령이 후보 시절 한 공약을 뒤집는다고 누가 감히 악덕으로 몰아붙이겠느냐는 뜻을 담은 ‘군주의 망은(忘恩)은 미덕’이란 말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면 국민이 불행해진다. 이런 식이라면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은 공약(空約) 목록이나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의 행정도시 원안 추진 공약을 금석맹약(金石盟約)으로 믿었던 충청인은 요즘 맥이 빠지다 못해 배신감을 느낀다. 도공의 우직스런 자신과의 약속 지키기나 융통성 없이 약속만 지키다 목숨까지 잃는 미생지신( 尾生之信)은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약속만 지켜주길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공약을 실천함으로써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과 행복을 준다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한다. <논설위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