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편제는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 하지. 하지만, 한이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영화 ‘서편제’의 대사 일부다. 소릿재 폐가에서 ‘유봉’이 눈먼 딸 ‘송화’에게 소리공부를 시키면서 판소리 제(制· 소리 스타일)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나뉜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광주 보성지역,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인 구례, 순창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중고제는 충청도와 경기 남부에서 유행한 비동비서(非東非西:동편제도 서편제도 아님)의 충청도 기질이 녹아 있는 고박(古樸)한 맛의 소리다. 동편제와 서편제가 남도의 소리라면 중고제는 충청도 소리다.

서편제와 동편제는 대립항으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대표적인 전통음악으로 위치도 확고하다. 그러나 중고제는 그렇지가 못했다. 계승이 끊어진 유파로 분류되고 있다. 50년대 후반이 배경인 영화 ‘서편제’ 대사에도 중고제란 단어는 없다. 그때도 이미 그 존재가 미미했던 것이다.

중고제는 충청도 사람과 닮아 있다. 바탕은 슬퍼도 편안한 평조(平調)다. 천생 느린 충청도 말투 같다. 넉넉한 인심과 너그러움이 느껴지는 소리다. 서산 마애삼존불처럼 한없이 좋게만 생긴 충청도 양반의 심성이 북 장단을 만나 절정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소리다. 어떤 음악을 만나도 융·복합이 잘된다. 하지만, 그게 단점이다. 독특함이나 도드라짐이 약하니 동편제, 서편제에 휩쓸려 명맥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충청도가 그렇다. 모난 구석이 없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아 어디서나 잘 적응한다. 충청도는 인심이 좋고 텃세도 없어 삼남에서 몰려들었다. 예부터 충청도는 살기 좋은 고장 1순위였다. 양반 체면에 싫은 소리 못하니 순서에 뒤지고 제 몫 챙기기에 약했다. 손해 보는 일도 무시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앙부처의 지역인재 등용도, 국책사업 선정에서도 늘 2등, 3등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다음이다. 어느 정부 어떤 정권도 충청도 괄시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오죽하면 ‘멍청도’ 소리까지 들었다. 충청도 홀대론이 나오는 이유다.

이명박 정부라고 나아진 게 없다. 모 장관은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을 한 명도 당선시켜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적반하장이다. 홀대가 아니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지역 주민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자기부상열차, 로봇랜드 등 국책사업 선정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행정복합도시 원안 추진이 흔들리고 대통령 공약 사업인 과학비즈니스 벨트도 지지부진하다. 입지선정이 임박한 첨단의료복합단지와 뇌과학연구소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지만, 경쟁이 치열해 장담할 수가 없다. 이러니 대전은 되는 일이 없다는 푸념이 여기 저기서 나온다. 국책사업 배정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 피해의식마저 확산되고 있다. 금융위기 한파로 삶이 고단해져 화딱지가 나면 만만한 정부· 여당을 향해 종주먹질로 불만을 삭인다. 그만큼 서운함이 큰 탓이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 동력은 정치력에서 나온다. 지역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출향인사가 똘똘 뭉쳐서 정치력을 발휘하고 대전 마케팅을 해야 한다. 당장 먹을거리도 중요하지만 10년 후 먹을 곳간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채워 나가야 한다. 그 첫 단계가 국책사업과 국가기관·기업 유치다.

박성효 대전시장이 지난 20일 충청권 명사들의 모임인 백소회에서 “대전에 중앙행정기관이 더 내려올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정치력 1등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정치력 뒷받침을 역설했다. 옳은 지적이다. 지역발전을 위해서라면 여·야가 따로 없이 힘을 모아야 한다. 하루속히 ‘정치력 1등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모래알처럼 흩어져서는 대전의 미래가 어둡다. 중고제가 서편제와 동편제에 치여 명맥 유지가 위태롭듯이 정치력 결집이 안 되면 대전은 광주, 대구, 인천에 밀려 하위권 광역시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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