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근, 조선을 뒤덮다/김덕진 지음

400년 전인 우리나라 17세기는 100만명이 굶어죽는 격동의 시대였음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 나왔다.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가 쓴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는 책이다.

이 책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는 1670년(현종 11년)과 1671년에 일어난 대기근.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에 걸쳐 무려 100만명의 사상자를 낸 ‘경신 대기근’이다. 19세기 북유럽의 아일랜드에서 유례없는 감자 흉작으로 100만명 이상이 굶어죽고 100만명이 서둘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사례와 비교해 봄직한 사건인 셈이다.

봄가뭄이 극심했던 1670년 윤2월 서울 한복판에 아침부터 눈이 내린 것을 필두로 우박과 서리, 냉우(冷雨)가 여름인 6-7월까지 계속됐고 겨울이 되기도 전에 폭설이 내려 눈피해가 심각했다. 이듬해에는 봄가뭄, 여름 물난리, 초대형 태풍, 닥치는 대로 갉아먹는 메뚜기떼와 벌레들의 피해가 막대했다. 2년 동안 재앙은 조선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것이다. 17세기 세계를 휩쓴 이상저온 현상을 학자들은 작은 빙하기라는 뜻의 ‘소빙기’(小氷期)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이 시기 대기근도 같은 맥락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소빙기의 기후변화가 초래한 재해-흉작-대기근이 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구조에 큰 타격을 가했다. 진휼청의 상설기구화, 대동법 실시와 각종 제도개혁, 수차 보급, 18세기 영·정조 때의 사회 안전망 확보 등은 17세기의 경험이 낳은 결과였다는 얘기다.

기근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제주도의 경우 1671년 6월 굶주려 죽은 사람이 2260명으로 전체 주민의 20-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실록에는 “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먹은데 이어 마소를 잡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는 기록이 있다.

대기근은 2년 만에 가라앉았지만 17세기 조선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대기근에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고 진휼(賑恤·흉년이 들 때 빈민들을 구제하는 제도)과 방역제도가 잘 갖춰진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시 공간구성과 산업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연구결과다.

유민의 이동은 지역별 인구를 바꿔놓았다. 신분별 인구 점유율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근과 역병이 닥쳤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평민과 노비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양반층 인구의 점유율이 증가했다.

대기근은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현종 때 발생했던 두 차례 예송논쟁의 배경에도 대기근이 있다. 기근을 ‘하늘의 경고’로 봤던 성리학적 자연관 속에서 신하들과 재야의 선비들은 여러 가지 방책을 임금에게 강요했고 그 결과 마찰이 발생했다. 그러나 임시로 설치되는 빈민구제기구인 진휼청은 상설 기구로 자리 잡는 등 사회안전망이 구축되는 계기가 됐다. 또 백성을 구제할 재원 마련을 위해 납속(納粟)과 공명첩 발행이 성행하면서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재력으로 신분을 바뀔 수 있는 세상이 처음 시작됐다.

저자는 “17세기는 위기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한 시대였다”며 “북벌론, 반정, 예송, 환국, 대동법, 진휼청 등 조선의 주요 17세기사는 기후변화와 밀접히 연관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1만6000원. <류용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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