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공대 참사 범인이 한국인 이민자라는 보도를 접하는 순간 충격을 안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32명을 살해하고 3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총상을 입힌 용의자가 중국계로 추정됐던 첫날만 해도 마음속에 ‘한국인이 아니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한국인이 ‘수많은 미국인’을, 그것도 ‘미국 땅’에서 살상했다는 미증유의 사건으로 드러나자 국민들은 거의 똑같은 감정에 빠졌음을 기억한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미국에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며 민망해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동안 미국에 크고 작은 불만을 표시하고 일부는 반미의식을 가질 순 있었어도, 직접 한국인의 손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기를 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미 좀 하면 어때?”라고 호기 있게 말했던 대통령도 곧바로 세 번이나 사과의 뜻을 밝히고 국무총리도 깊은 유감과 사과의 말을 했다. 미국 정부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조문하고 사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자세였다.

국민적인 미안함 갖기는 처음

이에 대해 많은 진단들이 나온다. 한 이민자 학생이 엄청난 사고를 친 것에 대해 특유의 집단적 체면문화가 작동하면서 범인의 부모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있으며, 미국 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고 있는 동포들이 보복 받지는 않을까 하는 핏줄의식이 작동하고, 나아가 초강대국인 미국으로부터 유무형의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라는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잠재의식 속에 지위고하·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약하며,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게 됐다. 우리 스스로 세계화, 글로벌리즘을 강조해 왔지만 아직도 이에 가까이 가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미국의 총기문화 및 교육 시스템이 빚은 참사라고 보는 미국 언론과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도 당황해하고 한편으로 한국인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범인은 한국인 조승희가 아니라 이민자 ‘승희 조’이며, 미국 교육의 문제이지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이제 제발 그만 미안해하라고 요구한다. ‘조(Cho)의 가족을 죽여라’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등장하거나 한국인을 혐오하는 내용의 블로그, 인터넷 댓글이 눈에 띈다지만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버지니아 총격사건은 한편으로 우리가 가진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국내에 8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또는 지금 자라나고 있는 ‘코시안’들이 비슷한 사건을 저지르면 어떻게 할 것인지, 미연에 방지하려는 노력은 안 할 것인지 묻는다. 총기소지 허용 또는 불허의 차원이 아니다.

화살처럼 가슴에 꽂히는 차별

교육에서 소외된 외국인노동자 자녀들이 적지 않은데다 학교에 다니는 외국인노동자 자녀와 부모들은 피부색과 언어, 문화적 차이로 인한 차별과 괴롭힘을 호소하고 있다. 결혼이민자 자녀들 사정 역시 대동소이하다. 아무도 일하려하지 않는 3D업종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아무도 시집가지 않으려는 농촌 노총각들의 배우자로 데려온 뒤 외모가 다르고 한국인 고유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비인간적인 냉대와 차별, 부당한 대우를 일삼는다면 ‘한국의 승희 조’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아이들이 공부만 잘하기를 원하고, 공부만 잘하면 다른 잘못에 눈을 감다보면 아이들 인성은 황폐화되기 쉽다. 성장해서도 ‘수준’이 어울리는, 수준이 높은 사람들 하고만 끼리끼리 어울리라고 가르치지는 않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비뚤어지고 황폐화된 인성은 다른 아이들을 공격적으로 대하기 일쑤이고 외국인노동자 자녀, 코시안들을 쉽사리 놀림감으로 삼는다. 이런 놀림과 차별은 화살처럼 날아가 그들의 가슴에 꽂힌다. 우리의 의식과 자세가 저급하고 폐쇄적이진 않은지 자문해볼 때다. 혹여 만에 하나 나중에 불행한 사건이 나더라도 남의 탓, 핏줄 탓 하지 말자. 그때도 남의 탓 한다면 ‘선진국 진입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식의 말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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