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두 축은 크게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두 진영은 특히 고대사를 논할 때 첨예한 의견대립을 보인다. 한 예로 재야사학은 우리나라 국가의 기원을 고조선건국(기원전 2333년) 이전으로 올려 잡자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반면 강단사학은 재야사학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약하다고 반박한다. 그러면 재야사학은 다시 아직도 식민사관에 젖어 재야사학 제시한 근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단사학을 몰아붙인다.

강단·재야학계 견해차 심해

고구려를 소재로 한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인기 드라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강단사학의 대체적인 의견은 부정적이다. 과학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역사를 다룬 드라마는 민족의 우월성만 강조해 오히려 진정한 역사발전에 걸림돌이란 것이 강단사학의 논리다. 재야사학의 반응은 대조를 이룬다. 허구라는 드라마 속성은 일정부분 불가피하지만 우리 고대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내린다.

신학기를 앞두고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단국신화’가 ‘역사’로 편입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동안 이 교과서에는 고조선 건국과 관련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라고 기술됐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펴낸 책임에도 ‘건국’을 남의 나라 얘기하듯이 ‘-고 한다’라는 표현을 썼다. 올부터는 학생들이 이 부분을 삭제하고 ‘건국하였다’로 수정된 교과서를 배우게 됐다. 하지만 달라진 내용은 없고 표현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도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반응은 역시 다르다. 강단사학은 ‘-고 한다’라는 세 글자를 삭제했다고 해서 단군신화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과학적인 고증과 연구가 전제돼야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반면 재야사학은 단군과 고조선사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서, 늦어도 너무 늦었고 내용도 만족할 수는 없는 수준이지만, 단군과 고조선사의 역사 편입을 반기는 분위기다.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상호불신임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재야사학은 강단사학을 식민사관에 찌들었다고 공격한다. 강단사학의 재야사학이 논거로 삼는 자료가 위서(僞書)라고 몰아붙인다. 상호불신은 일제강점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됐다. 급기야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은 서로의 정당성을 놓고 국회에서 한판 붙었다. 지난 1981년 11월 26일 제108회 국회 문교공보위원회는 재야사학 진영이 제출한 ‘국사교과서내용 수정요구에 관한 청원’을 다뤘다.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측을 대표하는 진술인들이 열띤 공방을 벌였다. 결과는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한 셈이 됐다.

상호공방으로 혼란만 가중

문제는 두 진영의 공방을 지켜보며 어느 장단에 동조할까 고민하는 국민과 학생들이다. 식민사관이 상당부분 제거되지 않은 교과서를 배운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는다고 재야사학은 주장한다. 강단사학은 인정할 수 없는 위서를 근거삼아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려 과학적인 역사연구를 방해한다고 재야사학을 나무란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과연 어느 주장을 수용해야할까?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믿자니 위서에 근거했다고 하고, 교과서를 신봉하자니 식민사관이 여전하다고 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제압제를 벗어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재야사학의 강단사학에 대한 공격대상은 여전히 강단사학이 견지한다는 식민사관이다. 재야사학의 주장대로라면 국민들은 특히 학생들은 부분적으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를 배우고 있다. 강단사학도 재야사학을 반박하는 위서문제를 분명히 해야한다. 위서라고 단정하는 근거를 밝혀야 한다. 양 진영은 근거가 미약하거나 터무니없는 이론에 결국은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국민에게 지탄받는 주장은 역사에 떳떳하지 못한 이론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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