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파탄 참모진 책임 커, 성공한 대통령 만들어야

노무현 대통령은 왜 실패의 길을 걷게 됐을까. 무엇이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개혁과 통합을 외치며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임기를 1년 앞둔 지금 초라하게 퇴장을 준비하고 있다.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면서 그의 실패는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한다. 대권을 잡는 것 이상으로 성공한 국정 운영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다. ‘노무현발 실패’는, 선거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점이라는 교훈을 던진다.

원인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 보좌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핵심 측근들인 386은 대선에서 시대정신을 내세워 정권을 창출했다. 그러나 너무 일찍 권력을 잡아서인 지 국가를 이끌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진보적으로 헌신했다고 자부하겠지만 그 가치와 이상을 합리적인 정책으로 내놓지 못했다. 섣부른 개혁 추진은 결국 국정 파탄이라는 기막힌 현실을 낳았다. “보스가 명성을 얻는 것은 보스 자신의 소질 때문이 아니라 참모의 좋은 조언 덕분이다”(마키아벨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참모라는 개념은 원래 동양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춘추전국시대 지식인들은 제후를 위해 전략과 정책을 제시하며 자신을 세일즈했다. 이른바 책사(策士)들이다. 모사(謀士)라는 또 다른 표현에서 보듯 깨끗한 이미지만의 지식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각 나라를 돌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선전하고, 때로는 군주에게 스카우트되어 정치에 참여했다. 이후 제자백가로 불리며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며 정치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정치적 관행은 동북아에서 일반화된다. 셀 수 없는 책사들이 주군을 모시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고자 했다. 물론 대다수의 실험은 비극 또는 실패로 끝났다. 오자서는 어리석은 주군을 만나 죽음을 당했고, 유자광은 간신의 손으로 역사가 농단됨을 보여줬다. 유비와 제갈량, 왕건과 최응, 태조와 정도전이 있지만 완벽하게 이상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나라를 세우고, 나아가 태평의 시대를 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단연 주목되는 인물이 미국의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미국 건국 과정의 아버지들’ 중 한 명으로 미국 10달러 지폐 속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견뎌야 했지만 17세 때 쓴 그의 글에 매료된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뉴욕 유학 길에 오른다. 곧이어 터진 독립전쟁은 드라마틱한 인생의 전환기였다. 자원 입대한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 되어 전쟁 초기 대세를 거머쥔 뒤 프랑스 지원을 이끌어내 승리의 발판을 다진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초대 재무장관이 되어 신생 독립국인 미국의 청사진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상공업이 중심이 된 강력한 산업국가라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이후 해밀턴주의로 불리는 중상주의의 대명사가 됐다. 차관 상환과 참전 군인 체불 문제 같은 숱한 재정 위기가 닥쳤지만 중앙은행을 창안하고, 산업을 유치함으로써 오늘날의 미국 토대를 튼튼히 했다.

해밀턴에서 참모의 역할 모델을 찾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최근 대선 주자들의 측근 행태는 우려스럽다. 일부 유력 주자 참모진은 벌써부터 네거티브 전략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한나라당의 빅2 캠프에서는 ‘검증론’을 놓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창업’에만 올인하겠다는 이같은 태도는 취임 이후의 ‘국가 번영’과는 아랑곳 없다는 태도로 보여 아쉽다.

해밀턴으로 모자라다면 기자 출신의 루이 하우도 있다. 탁월한 분석가이자 유능한 비판가였던 그는 루스벨트에게 당당히 “아니오”라고 말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도록 한 인물이다. 토니 블레어를 ‘열정의 지도자’로 만든 필립 굴드도 있다. 이렇듯 참모는 리더의 오른팔이자 핵심 브레인이다. 그렇다면 당선의 1등 공신 차원을 넘어 성공한 대통령의 ‘수단’이 되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동안 실패한 대통령만을 만나왔다. 참모진의 면면을 살펴 보는 것도 성공한 대통령 시대를 여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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