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체 완성등 서예분야 독보적 위상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문자향·서권기’로 회자되는 추사 김정희의 서예관은 조선 후기의 예술정신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 등 많은 호로 불렸던 그는 1786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33세인 1819년, 문과에 급제, 세자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24세 때 중국 연경에 갔던 그는 당대의 거유로 칭송받은 완원·옹방강·조강 등과 교유하며 경학·금석학·서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8년만에 풀려났고, 1851년, 헌종의 묘천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나기도 했던 것이다.

추사는 학문연구 방법으로 실사구시를 주장했다.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해야한다는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실사구시설’을 저술해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서예분야에서 그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그는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했고 예서·행서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이룩했다. 또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했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을 밝혔다. 불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베이징에서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했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귀가해 세상을 떴다.<南尙賢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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