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작물에도 ‘암’이 있다.

생산량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만, 마땅히 치료할 방법이 없어 농민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병이 있는 것이다. 쌀 수확량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도열병’도 그 중의 하나다. 도열병은 잎, 마디, 이삭 목, 이삭가지, 볍씨 등 벼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발생하는데다 일단 걸렸다 하면 치료방법이 없기 때문에 ‘농민들의 가장 큰 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가 쌀을 먹고 있는 만큼 피해도 세계적이다. 세계 매년 쌀 수확량의 10% 정도가 도열병 때문에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정도면 전 세계 600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도열병을 막기 위한 벼 품종 개량이 활발하게 연구돼 왔다.

최근에는 첨단 유전공학기술을 이용해 유전자 조작을 통한 품종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문제는 도열병에 저항성을 갖는 벼 품종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는 점이다. 도열병에 강한 품종을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몇 년 못 가서 내성을 갖는 도열병 균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벼 육종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서 있고, 지난 1세기 동안 200개가 넘는 벼의 품종을 개발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열병에 대항할 수 있는 벼 품종 개발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결국 현재까지 벼의 잎이나 줄기 심지어 이삭까지 말라죽는 벼 도열병을 막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화학적으로 합성된 농약을 쓰는 것이다. 볍씨를 벤레이트티, 리프졸 등의 약품으로 종자소독 후 심고, 못자리의 어린 싹과 이삭이 올라올 때부터 수확을 바로 앞둔 시기까지 다양한 농약을 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제도 곧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친환경적인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화학농약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대 이용환 교수팀이 지난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과학자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벼 도열병을 일으키는 곰팡이 균의 유전자를 완전히 해독해내, ‘도열병 퇴치’에 희망을 갖게 하고 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벼 도열병의 병원균이 염색체 7개에 유전자가 1만1109개라는 사실과 유전체(염색체 + 유전자) 전체를 구성하는 염기 3787만8070개의 배열 순서와 도열병 균이 일반 균에 비해 7-10배 정도의 유전자가 많은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도열병 균이 벼의 세포벽을 분해하는 등 벼에 침입하는데 필요한 단백질이나 신호전달체계와 관련된 유전자를 다수 찾아내는 성과도 거두었다.

벼의 유전자가 밝혀지면서 기존의 우량종과 교배시키는 등의 방법과 유전자 조작을 통한 다양한 품종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품종개량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한 두 가지 병해충에 강할 뿐 갖가지 병에 두루 강한 품종은 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열병과 벼의 유전자를 완전히 해독한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아직까지 각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를 더 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기고 있지만, 벼와 함께 곰팡이의 유전자 설계도를 확보한 만큼 방어와 공격무기를 만드는 일은 과거보다 훨씬 쉬워지게 된 셈이다.

미래로 갈수록 식량은 무기화되는 추세다. 이제 보물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손에 넣었으니, 조만간 보물을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