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구약 출애굽 이야기와 관련해 기억할 만한 영화는 `십계`, `이집트 왕자`,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영광의 탈출` 등이다. 앞의 세 작품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으로 탈출한 고대의 엑소더스를 다룬다. 물론 주인공은 모세다. 반면 트럼펫의 웅장하고 장엄한 선율로 시작하는 OST가 MBC 주말의 명화 시그널 뮤직으로 사용해 더 유명한 `영광의 탈출`은 2차 세계대전 후의 현대판 엑소더스를 다룬다.

출애굽 주역 모세 이야기에 근간을 두고 변주되는 이들 영화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모세가 야훼의 `부르심`을 듣는 대목이다. 다들 아다시피 모세는 호렙산에서 노예 신세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야훼의 목소리, 즉 민족 지도자로 호명돼 위대한 탈출을 감행한다. 그는 신의 계시에 따라 억압받는 히브리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신의 부르심을 듣고 각성한 후 존재전환을 이룩하는 문법은 선지자들이 경험하는 흔한 서사다.

선지자들은 신의 부르심을 받아 소명을 부여받고 주체를 정립해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어쩌면 갈릴리 시골 촌놈 예수가 입사(入社) 전에 광야로 나간 것도 야훼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 아닐까? 광야를 떠돌며 각성한 후 공적 생활에 진입한 예수는 갈릴리의 가난한 목수 아들, 더 이상 시골 촌뜨기가 아니다. 이를테면 모세나 예수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신의 부르심을 받고 공적 주체로 다시 태어나 존재의 대전환을 이룩한다.

근대 이후 신성한 신의 부르심은 세속화한다. 가령 칼뱅의 직업 소명설처럼 호명은 선지자들의 성스런 사명이 아닌 세속적 활동, 즉 직업이 된다. 라틴어 `vocare(부르다)`에서 나온 말이 `vocation(직업)`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신적 초석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상기하자. 이쯤 되면 시장과 자본이 신을 대신해 우리를 부른다. 그뿐인가. 중세가 저물고 근대 민족국가가 건설되면서 호명의 주체는 국가나 민족으로 바뀐다. 국가, 민족, 역사, 이념 등 거대담론은 우리를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 주조해낸다.

선거철, 특히 대선이 가까워지면 초월적 대(大)타자의 부르심, 신의 환청을 들은 군웅들이 총궐기한다. 이들의 출마선언은 국가와 국민과 역사의 부르심이라는 뻔한 수사를 빼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란 판이다. 사적 권력욕을 드러낼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들은 국가와 국민과 시대적 부르심을 받아 찌질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선지자임을 자임한다. 이럴 때 "광채가 나는 눈을 가진 선지자의 입술 사이로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다운 음성, 나를 믿으라!" 읊조리는 장기하의 `아무것도 없잖어`가 환청처럼 들리는 이유는 뭘까? 독자 제위께 일청을 권한다.

7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 언론매체는 유력 인물들의 발언과 행보로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단연 눈길을 끄는 이는 검찰총장을 사퇴하고 대권 가도에 뛰어든 윤석열 예비후보, 이 분도 소명의 알리바이나 대의명분을 포장하는 데 국가와 국민과 시대의 부름을 아낌없이 강조했다. 결기에 찬 소명의식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저마다 그토록 장한 일에 부름 받았다 자처한 현대판 모조 선지자들이 보여주는 오만과 독선, 몰상식과 거친 언사다. 역시나 이 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면상 다른 발언들은 차치하고 `탄소중심`, `지평선`이란 오기와 이한열 열사 벽화를 부마항쟁 역사물로 오인하는 진지한(?) 무신경, 무감각, 무성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풍차를 거인으로, 여관 주인을 공주로 여긴 돈키호테와 뭐가 다른가. 혹자는 사소한 실수 실언이라 치부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선 사소한 실언이나 농담은 주체의 정체성이나 욕망의 본질을 고스란히 반영한 산물이라 한다. 하이데거의 명제를 고쳐, 언어는 존재의 거울이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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