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공군 부사관 여군이 상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여러 차례 신고했다. 그러나 모두 묵살됐고, 2차 가해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동료를 비롯한 부대 관계자와 가해자는 사건을 무마 은폐하기 위해 온갖 회유와 협박은 물론 2차 가해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행태는 국선 변호사는 물론 군 검경과 지휘관들도 마찬가지로 군대답게 일치단결했다. 공군참모총장이 사퇴하고 대통령까지 나서 엄정한 수사와 처벌을 지시했지만 별로 달라질 게 없을 거라는 예상은 역시나 들어맞았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국민적 공분에도 오물에 찌든 책임 있는 군 인사들은 시궁창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없어 보인다. 오죽하면 국정조사를 요구할까.

군대가 나를, 내 딸을 성추행했다. 그리고 짓밟아 뭉갰다. 유린했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헌법조항과 남녀평등론을 근거로 여성징병까지 주장하고 나서는 마당에 군대는 창창한 여군 장병을 무참히 저버렸다. 이게 어디 군대만의 일인가. `군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칼럼 제목은 임지선의 `현시창`이란 책의 한 꼭지, `회사가 나를 성희롱했다`를 비튼 표현이다. 통사론적으로 회사를 군대뿐 아니라 국가나 사회, 어떤 조직이나 집단으로 바꾸고, 성희롱은 성추행뿐 아니라 성폭력, 배제나 차별, 소외나 억압 등의 계열체 단어로 바꿔도 의미는 그대로 통한다. 현실은 시궁창이다.

임지선의 이 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자신을 스스로 도우라는 자기계발, 인간의 존엄이나 평등사회 같은 유의 담론이 얼마나 가학적이고 허망하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뒤집어씌우는 폭력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이런 종류의 담론이 은폐한 위선과 기만과 허구성을 우리 시대 청년들이나 여성, 약소자, 장애우, 비정규직, 외국인노동자 등 마이너리티들의 피투성이인 실존적 현실을 통해 고스란히 되비춘다. 이 책의 부제 `대한민국은 청년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가 환기하듯 대한민국 군대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의 팔루스(Phallus)를 제 손으로 거세한 여성징병론자는 헌법조항과 군역평등의 이름으로 여성을 부를 자격이 없다.

군대도 사회와 같다. 평등하지 않다. 사회에서의 남녀 불평등은 특히나 폐쇄적이며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군대와 같은 조직에서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다. 지극히 남성중심적이며 조직동조성이 어느 집단보다 강한 군대 같은 곳에서는 더 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와 군대의 차이를 비교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그놈이나 이놈이나 오십보백보 아닌가. 가령 `회사가 나를 성희롱했다`는 르포의 주인공인 삼성전기 이은의 대리나, 서지현 검사 추행 사건을 보라. 몇몇 민선 시장들의 악행을 보라. 그리고 비일비재한 직장내 성 관련 사건을 보라. 이건 개인적 일탈이나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멀쩡한 표정의 우리 사회 이면에 악마적으로 편재하는 일상의 얼굴이다.

고착화된 분단체제,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협정이나 군축의 전망조차도 요원해 보인다. 저출산은 지속될 것이며, 첨단화와 경량화된 장비는 여군에게 최적화된 형태로 날로 변화해갈 것이다.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도 현대전은 총 쏘고 수류탄 던지며 백병전을 펼치는 게 아니란 건 다 안다. 상황이 이럴진대 헌법조항이나 병역의 남녀평등론이 아니라도 여군모병제 확대는 물론 여성징병을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군의 권력구조와 인적 구성이 평등하지 않다는 데 있다. 군의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지배구조와 권력관계에서 여군은 소수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다. 을일 수밖에 없다. 이래서 여성징병론이나 모병에 앞서 여군 장성의 확대나 간부화가 절실하다. 단순 논리로 여군 중사의 부대나 군내 주요 지휘체계 계통에 여군 장성이나 간부가 얼마라도 포진해 있었다면 이런 반인륜적 악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젓이 벌어질 수 있을까. 군대와 사회와 국가를 비롯한 우린 공동정범, 하여 이 칼럼을 비롯한 어떤 통곡이나 분노도 가식이거나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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