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선임연구원
이항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선임연구원
한 낡고 오래된 도서관이 있다. 지어진 지 약 46억 년, 그동안 사고와 붕괴의 위기를 수없이 겪었음에도, 다행히 운이 따라주었고, 끊임없이 개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고풍스런 아름다움과 현대적 세련미가 조화를 이룬 이 도서관의 자랑거리는 서가에 보관된 방대한 규모의 장서다. 비록 설립 초기의 소장 도서 일부는 사라졌지만, 약 44억 년 전의 책 조각이 발견돼 이 도서관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 도서관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선사시대부터 인류는 쉽게 사라지는 기억을 대신할 기록을 남겨왔다. 그것은 어두운 동굴 벽에 장난으로 남긴 손자국이기도 했고, 사냥하고 싶은 들소나, 두려워 피해야 할 호랑이이기도 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휘갈기기도 했다. 문자를 발명한 인류는 마침내 애매한 의미의 그림에서 벗어나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더욱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됐다.

지구라는 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들은 지구가 기록한 역사, 즉 지사(geologic history)이다. 그 책은 하나하나 형형색색의 암석과 지층이라는 페이지로 구성돼 있는데, 중도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의 장을 마무리하고, 아주 큰 사건이 일어나면 한 권을 마무리하며 서가에 꽂아 보관한다. 특히 지구가 들썩일 만큼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통째로 서가의 보관구역을 나누어 버린다. 거기엔 지구 탄생부터 약 5억 4100만 년 전까지 선캄브리아시대와, 약 2억 5200만 년 전까지 고생대, 약 6600만 년 전까지 중생대라는 구역이 이미 구성을 마쳤으며, 신생대 구역의 서가에는 새로운 책들을 채워가는 중이다.

이렇게 중요한 지사를 기록한 책들 중 한 권을 꺼내 열어본다면, 여러분은 `화석`이라는 아주 낯선 문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무언가 적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고장 난 볼펜으로 끄적거린 듯 희미한 자국들 뿐, 형태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상형문자나 암호 같기도 하다. 더구나 오랜 세월 동안 `지구도서관`에 닥쳤던 사건 사고들로 이미 많은 책들이 유실되고 손상되고 찢겨 나갔기에, 그나마 기록으로 남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고작 1% 미만이다.

1822년 샹폴리옹(Jean-Francois Champollion)은 세 가지 언어로 쓰인 고대 법전 `로제타석(Rosetta Stone)`을 연구해 미스터리에 싸여 있던 고대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해 냈다. 그는 이미 알려진 고대그리스어와 고대이집트 민중문자를 열쇠로, 그동안 풀리지 않던 고대이집트의 신성문자(상형문자)가 표의, 상징, 표음문자가 복합된 것이었음을 밝혀내어, 벽화와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수천 년 고대이집트의 역사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화석 연구도 마찬가지다. 고생물학자들은 화석이 이야기하려던 문장을 절대 온전히 발견할 수 없다. 이미 알려진 현재의 생물과 화석생물, 그리고 서로 유사한 화석생물 사이를 비교 분석하면서 불완전한 화석을 복원하고, 손실된 지사의 빈틈을 메워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추정해 내야 하는 것이다.

우주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인류가 이미 도서관 속속들이 그 규모와 소장 자료를 모두 다 아는 양 우쭐대고는 있지만, `지구도서관`은 깊고 넓다. 사라진 줄 알았던 책과 페이지, 존재조차 몰랐던 비밀의 방이 언제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그 시간과 그 장소가 바로 나의 시간과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비단 나만의 소원은 아니지 않을까? 이항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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