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희 갤러리 숨 대표
이양희 갤러리 숨 대표
로컬푸드 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어릴 적에 보았던 기억이 가물한 이름이 붙은 나물이 눈에 들어왔다. 홀리듯이 아득하게 잊혀진 엄마 냄새가 나서 나물들을 잔뜩 장바구니에 담아 왔다. 취나물과 방풍나물, 참나물 정도는 자주 먹는 거라 맛을 내 거나 무치는 것은 익숙하지만 나머지는 잘 만들 줄도 모르면서 구매했다. 그나마 데치기 전에는 구분이 가능했던 나물도 여섯 가지를 삶아 놓고 보니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씻은 나물을 자연 그대로 맛보고 어울리는 재료를 넣어 보았다.

쌉싸름이 과한 것은 된장이나 고추장을 넣어 무치고, 향이 순한 것은 나물 맛대로 조선간장이나 액젓 정도 만 넣고 무쳐 내었다. 정성 들인 봄나물 반찬들은 새우와 표고버섯 호박을 순하게 볶아 호박 새우탕을 만들어 오랜만에 시골밥상을 차렸다. 사계절 중 유독 봄에 나오는 나물은 왜 그토록 쓰고 유달리 향기가 가득할까 생각해 보면 봄나물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 특성을 두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작고도 여린 몸으로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은 땅속에서 잔뜩 움츠리고 추위를 견뎌내며 언 땅의 강력한 저항을 디디고 대지 위로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그 힘은 여간 독하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내력을 지녀야 한다

스스로 내력을 쌓지 않으면 얼어 죽고 쭉정이가 되고 호기롭게 고개를 들이밀면 밟히고 그 척박함을 견뎌야 비로소 봄 햇살을 받으며 향기가 가득한 새싹으로 대지에 얼굴을 내밀 수 있다. 그 내력은 말할 나위 없이 고유한 향기가 가득 품어 나오고 안으로 단단한 것들은 영양을 잔뜩 머금고 올라온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인생의 굴곡을 모질게 버텨낸 사람, 인생을 겪어내며 단단함으로 무장해 고유한 자신의 내면을 발현하는 성숙함, 그 사람은 가까이에 서면 그 자체로 아우라를 품는다.

봄이 오면 산이나 들에서 자라 나온 알 수도 없는 풀때기 반찬만 주던 엄마의 가난한 밥상이 생각난다. 짭짤한 된장국과 보리 섞은 거무죽죽한 밥에 나물 반찬이 전부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 초라한 밥상은 내 몸을 키우고 내 심성을 다듬어 주던 온 생애를 지탱해 준 양식이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쓰디쓴 반찬을 받아먹던 어린 시절, 왜 그렇게 나물 반찬만 주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집에는 흔하디흔했던 달달하고 비릿한 맛이 나는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이런 반찬들은 우리 집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린 내게 가난은 쓰고 거칠고 입안에 맴돌아서 도무지 쉽게 목구멍을 넘길 수도 삼켜지지도 않는 맛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 부모가 되어보니 마냥 목 넘김이 좋은 음식들만 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몸에 좋은 모든 것들은 쓰고 쌉쌀하다. 인생의 맛도 그러해서 즐겁고 행복하고 기쁨으로 넘치는 환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통 뒤에 회복된 마음. 슬픔 뒤에 찾은 안정. 치열한 자기 성찰 뒤에 오는 성취감과 사명감. 고난 끝에 얻어낸 결과물. 일만 시간의 법칙처럼 생애를 바치듯 평범한 습관들로 이루어낸 성공. 모두 쓰디쓴 인생의 맛을 맛보아야 느낄 수 있는 환희와 기쁨의 참다운 맛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그 쌉쌀한 나물 맛이 봄날 나른한 내 정신을 다시 맑게 해주고 쓰디쓴 인생을 겪어 낼 때마다 버텨내도록 힘이 되어 주었듯 나는 오늘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매일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딸아이에게 쌉쌀한 나물 비빔밥을 내밀며 잔소리를 해본다. "인생이 그러하듯 입에 쓴맛이 몸에도 좋은 거야" 이양희 갤러리 숨 대표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