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국민의힘 국회의원
정진석 국민의힘 국회의원
2020년 6월 1일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다음 날 국회 본관 7층 의안과 앞에서는 1호 법안 제출 경쟁이 벌어졌다.

오전 9시 의안과가 문을 여는 즉시 법안을 내려고 보좌진들은 4박 5일 밤샘 불침번까지 불사한다. 가장 먼저 접수되면 21대 국회 첫 의안을 뜻하는 2100001번을 받는다. 언론 주목도가 높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국회 임기 시작 무렵마다 이 같은 진풍경이 반복되고 있다.

요즘 정당에서는 공천심사를 할 때 의원들의 입법 성과를 평가한다.

2019년 10월 31일 국회 의안과의 풍경은 의원들이 그 기준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줬다. 이날 의안과 앞에는 A당 소속 의원실 보좌진들로 가득했다. A당은 21대 총선 공천 기준에 법안 발의 실적을 포함하겠다고 밝힌 상황이었고, 이날은 법안 발의 실적평가 마감일이었다. 이날 하루에만 무려 185건의 이른바 `건수 법안`이 접수됐다.

국회의 입법권은 의원에게 주어진 최고의 권리이자 의무다. 의원들이 국민의 요구를 담은 훌륭한 법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활발한 의정활동의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입법을 부지런히 하면 좋은 국회일까?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훨씬 많다고 본다. 16대 국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법안 발의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용량초과 상태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6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2507건, 17대 7489건, 제18대 1만 3913건, 제19대 1만 7822건, 제20대 2만 4141건으로 폭증하고 있다.

제20대(2016~2020년)를 기준으로 국회에서 발의된 2만 4141건의 법안 중 8799건이 통과(36.4%)됐다.

이는 의원 1인당 4년간 평균 80.5건의 법안을 심사해 29.3건을 통과시킨 셈이다. 주요 국가와 비교했을 때 프랑스의 20배, 일본·독일의 60배, 영국의 80배를 넘는 수치다.

의원입법에는 국회의원 10인의 이름이 필요하다. 인편이나 팩스로 법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요청하던 방법도 이제는 진화해 메신저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코로나19 시대에 맞춘 비대면 발의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 발의된 법안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검토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의원들도 법이 미칠 영향이나 부작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통과시키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이 그런 사례다. 전기용품이나 어린이용품 등을 만들거나 수입하는 업체는 제품이 안전기준에 적합하다는 KC 인증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2015년 12월 31일 법이 개정되면서 의류·잡화 등 신체에 접촉하는 용품 대부분도 KC 인증 표시를 받도록 바뀌었다. 안전한 제품을 판매하라는 법의 취지는 좋았지만, 액세서리나 옷 등을 파는 영세업자들이 수십만 원에 달하는 인증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현실을 무시한 악법이라는 비판이 일고 여론이 악화하자 여야 공동으로 소상공인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법안을 재개정했다.

입법은 규제다. 국회 스스로 자정(自淨)에 나서야 한다. 가치 있는 법안을 사전 검토를 통해 선별 발의하고, 충분한 심사와 토론·조정을 거쳐 `제대로` 된 입법 활동을 한다면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하고 법안의 질적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법안의 건수와 수치를 통해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 순위를 매겨온 정당과 언론, 시민단체들의 평가 방식도 고쳐져야 한다. 무엇보다 의원들 스스로 보여주기식, 실적 채우기식 졸속 법안 발의는 자제해야 한다. 의원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정진석 국민의힘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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