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학과 교수

신계숙 교수가 개인연구소인 계향각에서 대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송충원 기자
신계숙 교수가 개인연구소인 계향각에서 대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송충원 기자
청년과 중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경륜은 쌓이고 안정감은 높아지지만, 생각과 겁이 많아져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50대 후반의 여성이라면 생물학적으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중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신계숙(57) 배화여대 전통조리학과 교수의 일상은 늘 청춘이다.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맛 집을 탐방하는 EBS 프로그램 `신계숙의 맛터싸이클 다이어리`의 진행자인 그는 유쾌한 도전을 끊임 없이 즐기는 청년이다. 대학 졸업 후 중국음식점 종업원으로 취직했고, 10년 가까이 음식을 배운 뒤에는 창업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음식공부모임을 위한 개인연구소를 차렸고, 방송과 강연으로 항상 분주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섹소폰을 배우다가 이제 드론까지 날리는 그는 본인의 인생만 유쾌하게 가꾸는 게 아니라, 방송활동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이제 대중들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전파하는 인플루언서다.

서울 후암동 소재 그의 개인연구실인 계향각을 찾았다. 10평 남짓한 공간에는 요리를 하는 주방, 담소와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테이블이 정갈하게 배치돼 있다. 그리고, 연구소 한 쪽에 놓인 옷걸이에는 오토바이 전용 점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교수이자 요리사인 그에게 준비해간 첫 질문을 하지 못했다. 오토바이 점퍼를 보자마자 할리를 타게 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오토바이를 타게 됐나

"3년 전 어느 봄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갱년기 증세로 열증이 왔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타기로 마음 먹었고, 처음에는 후배가 권유한 스쿠터를 탔다. 1년 여 동안 도로에 적응하고, 오토바이에 대한 자신감이 더해진 뒤 평생 소원이었던 할리데이비슨에 도전한 것이다"

-늦은 나이에 위험하지 않나

"교통수칙만 잘 지키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 활강하는 느낌이 너무 좋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하는 기분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멋있다고 하는데, 그 맛에 타는 것 같기도 하다(웃음). 사실 할리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대도 아니고, 50대 꾳중년 여성이 할리를 탄다는 것 자체가 희귀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방송을 하게 됐고, 방송 보신 분들의 요청에 따라 특강도 많아졌다. 오토바이를 탄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다"

-방송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개인 SNS에 할리를 타는 모습을 올려놨는데, 이를 본 작가로부터 `EBS 세계테마기행` 진행을 제안받게 됐다. 지난 해 1월 중국에서 촬영했고, 3월 방송예정이었는데, 사스 문제로 한중관계가 얼어붙으면서 4월 말로 연기돼 전파를 타게 됐다"

신 교수는 요리와 관련된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겸비했으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유쾌한 입담까지 선보인 덕에 시청자들로부터 호응이 크다. 그가 출연한 세계테마기행 타이완 편은 최근 10년 간 최고의 시청률인 4.25%를 기록했다. 이후 EBS는 지난해 여름방학에 맞춰 신 교수의 이름을 내건 중국기행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중국촬영을 할 수 없게 되자 `맛터싸이클`로 변경한 것이다.

-맛터싸이클도 인기가 높다. 방송마다 인기를 끄는 비결은

"진짜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촬영할 때 억지로 연출하기 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도록 노력한다. 유명 연예인도 아니어서 일반 시청자들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저를 알아봐주시는 분 들은 거침이 없다. 일례로 강원도 울산바위에서 촬영하던 중 누군가 `저기 계숙이 아녀!`라고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 정도면 평소 친분이 있는 지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면식도 없는 일반인이었다.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중인 그는 삼겹살 맛있게 대접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촬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지난 달 제주도에서 촬영하던 중 60대 어르신을 만났다. 고등학교 역사교사 출신이라는데, 내가 출연한 모든 장면을 기억하실 정도로 열광적인 팬이셨다. 그 어르신이 내게 건넨 말이 `당신은 애국자입니다`이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이처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일반 국민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게 너무 고맙다는 것이다. 뭉쿨하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됐다."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도 촬영한 적이 있다.

"방송가에선 제주도나 강원도 촬영은 10번 가도, 충청도는 안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섭외가 어렵고, 반응 역시 시큰둥해서 기피대상이라는데, 제작진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고향을 새롭게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촬영이후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태어난 곳이자,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당진에 대해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방송에서 소개된 식당도 더 잘된다고 하니, 기분 좋다"

그가 공들이는 또 다른 분야는 3년 전부터 개인연구실인 계향각에서 진행되는 `수원식단` 공부모임이다. `수원식단`은 청나라 때 시인 원매가 쓴 조리서로, 신 교수가 2015년 이를 해석한 책을 출간했다. 그는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 책에 나온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교모임을 만들었고, 현재 3개 팀을 운영중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존 팀들이 활동을 연장하겠다고 해 아직은 새 팀을 만들 수 없는 상태다.

- 많은 일을 하다 보면, 방전될 것 같다. 굳이 연구모임을 하는 이유가 있나

"멤버들이 내는 회비 대부분을 좋은 식자재 구입에 사용하고 있어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음식에 편안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멤버들도 좋아하지만, 내가 너무 행복하다. 또한 오랫동안 정기적인 자리를 이어온 덕에 멤버십이 탄탄해지고, 커리큘럼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인근에 농장이 있는 멤버가 있어 야외 수업을 하거나, 외부강사를 초빙하기도 하고, 중국 미식기행도 다녀왔다. 돈보다 귀한 자산이 쌓이고 있다"

- EBS 외에 다양한 채널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다른 방송사에서도 이런저런 요청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의리를 지키고 싶고, 겹치기 출연은 더더욱 싫다. 근데, 방송활동이 늘수록 대학에 열중하고 싶고, 연구에 매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생긴다"

-교수가 천직이라 느끼기 때문인 것인가

"여러 일을 바쁘게 하면서 오히려 내 성향에 대해 되돌아본 계기가 된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하니 연구하고, 가르치는 게 가장 행복하다. 수원식단에서 공부하고, 좋은 분들과 교류하는 게 두 번째 행복이다. 방송은 할수록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앞선 두 가지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인생관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내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산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실천해야 하고,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나를 통해 대리만족한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대리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만족할 일들을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 실천력이 좋다는 게, 즉흥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제든 엉덩이를 들어 즉흥적으로 실천하는 것처럼 비칠 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행동하기 전 치밀히 검토하고, 충분히 준비한다. 단, 결정하면 즉시 실천하는 것이다. 할리를 탈 때도 스쿠터로 충분히 몸에 익혔고, 구입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나름 오랫동안 준비했다. 인생에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이 원칙은 한결같이 적용됐다"

- 고향인 당진, 충청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누군가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향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원동력이다. 구체적으로 결정한 것은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나설 것이다"

서울=송충원 기자

*신계숙 교수는

충남 당진에서 평범한 농부의 6번째 딸로 태어난 그는 14살 때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단국대 중어중문과를 졸업한 그녀는 중식 대가인 이향방 선생의 중화요리집 `향원` 주방에 들어갔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중국요리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당시 남자들만 있는 중화요리 주방에서 허드렛일과 `왕따`의 시간을 견뎌내며 8년을 일했다. 이후 중식당 개업이라는 일반적 코스를 또다시 벗어나 대만과 중국 상해에서 6개월씩 주경야독하며 실력을 쌓았다. 이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따고 배화여대 교수가 됐다. 방송을 통해 오토바이 타는 꽃중년 요리사로 유명해진 그는 여전히 엉덩이가 가볍다. 지금도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꿈 꾼다. 당장은 `양소록`이라는 또 다른 중국 요리고서를 번역중이며 공부모임도 추진예정이다. 섭외요청이 쇄도하고 있어 현재 진행중인 프로그램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차기 작을 결정해야 한다. 대학내 평의원회 의장을 맡고 있으며, 각종 특강요청도 끊이지 않는다. 유쾌한 도전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꿀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큰 의미로 다가간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하루하루는 늘 새로움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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