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내 고향 대전을 떠나 교직 타향살이 35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교육 봉직을 불과 2년 여를 남겼다. 1979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사범대를 거쳐 청운의 꿈을 안고 교사가 되었다. 당시 고교 동문들은 5대 도시 고교평준화의 틈새를 파고 들어 전통의 명문고로서의 초절정의 위상을 확고히 세웠다. 필자는 고교 3년간의 생활을 통해 공부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느 분야든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는 동기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금 동문의 우수함을 실감하였다. 그러면서 필자 또한 이 나라의 동량(棟樑)으로 교육계에서 어떻게 사도(師道)를 걸어가야 할지를 숙고하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빛과 그늘의 양면성이 있듯이 사교적이고 역동적이기 보다는 과묵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며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기질 탓에 교육자로서의 한정된 역할과 책임에만 머물러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매너리즘에 빠지는 필연적인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문제는 필자에겐 그 기간이 너무 길었다는 것이다. 뜻있는 동료들은 불혹의 나이를 경계로 자신의 진로를 재설계하고 보다 큰 뜻에 열정을 바쳐 제2의 인생의 출발을 맞이했다. 그들은 이제 안정된 위치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까지도 교실에서의 학생들과의 시간에 너무도 긴 여정을 함께 했다. 그때는 그것만을 군자삼락(君子三樂)의 하나로 간주하며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말이 저절로 다가왔다. 저만치 앞서 자신의 전문성을 쌓아가던 동료들은 소위 출세의 길로 접어들어 맘껏 자신의 철학과 존재의 의미를 빛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필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연민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교의 시선은 불행의 시작을 알렸다. 필자는 그 순간부터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대인 기피증이란 악재를 만났다. 그래서인지 한때 인연이 깊은 동료들은 필자가 전공(영어교육)을 살려 미국으로 진출했거나 아니면 명퇴를 한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만큼 소리 소문 없이 근 10년을 살았다.

한참이나 늦게 교감 자격을 취득하여 고교 교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남아있는 자존감은 첫 교감 발령교의 학교장과 인간적인 교류에 실패했다. 1년의 나이 차로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다 교사 경력 15년에 부장 경력 1년으로 교육전문직(장학사)에 벼락출세(?)하여 관리자의 길에 들어선 학교장은 무관 기질을 발휘하여 교감에게 과거의 상명하복이나 순종의 자세를 요구하였다. 게다가 오랜 기간 교단을 떠나 있은 탓인지 친절하고 자상하게 가르쳐야 하는 교육자의 근본을 망각한 채 말과는 달리 행동으로는 권위와 억압의 학교 운영과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교사는 마음속에서 응징하는 것에 실망하여 1년 6개월 만에 자원하여 학교를 옮기는 사태를 맞이하였다. 그리곤 현재의 `행복배움학교`에서 교육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올해는 교장 자격연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아프고 나면 성숙해진다.`고 한다. 관리자로서의 뒤늦은 의지는 그동안 젊어서 고향 대전에서의 봉직을 이루지 못한 것에 깊은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고 행복한 생활을 통해 성장하는 교육환경, 어느 누구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심화학습으로, 다른 분야에 관심 있는 아이는 재능을 키워 사회와 국가, 세계로 나아가는 인재로 키우고 싶다. 필자가 솔선수범하면서 학생 개개인의 재능을 기르는 교육을 실현하고 싶다. 이를 내 고향 대전이라면 더욱 애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시간이 없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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